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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국민주권적 개헌으로 새로운 100년을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

26 6월 [IF Media] 국민주권적 개헌으로 새로운 100년을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⑩안데스 산맥의 한국 ‘모자 보건병원’

출처 : 뉴스토마토

한겨울을 불태웠던 촛불혁명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주권자 민주주의가 안착을 시도하고 있다. 촛불 민주주의는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로 진화할 수 있을까. 촛불 민주주의가 한 국가의 틀을 넘어 보편적 인권과 평화의 대안으로 자리 가능할까. 보다 구체적으로는 개헌을 통해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이전한 후 광화문에 있는 정부서울청사에 국제연합(UN)과 그 산하 기구들이 들어올 수 있을까. 독일은 베를린으로 천도한 후 옛 수도인 본의 정부청사를 UN에 기증, 글로벌 공공센터로 거듭나게 했다.

한국은 국가의 틀을 넘어 보편적 인류라는 관점에서 세계사와 민주주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역사적으로 한국이 이런 고민을 한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동아시아 고전인 ‘대학(大學)’에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이 치국이라는 국가의 틀을 넘어 평천하라는 명제를 국가적 대안으로 모색하거나 국정 운영의 방향으로 제시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천하국가(天下國家)’의 글로벌 미래전략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이미 ‘중용(中庸)’을 통해 국가주의를 넘어 ‘천하국가’라는 보편적 인류의 관점을 제시했다. 중용에는 공자가 노나라 왕에게 전한 국정 운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무릇 천하국가를 위해 일함에 구경(九經)이 있으니 몸을 닦고(修身), 어진 이를 높이고(尊賢), 친한 이와 친하게 지내고(親親), 대신을 공경하고(敬大臣), 관료들을 내 몸같이 여기고(體群臣), 백성을 자식같이 대하고(子庶民), 전문가를 초빙하고(來百工), 먼 곳에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柔遠人), 다른 국가를 안아 품는다(懷諸侯)”는 구절이다. 공자는 21세기 인류가 고민하는 세계정부의 원칙을 천하국가라는 관점으로 구체화해 국정 운영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이 천하국가의 개념은 동아시아가 21세기 보편 인류의 거버넌스를 위한 철학적 기초로 제시될 수 있다.

문제는 조선의 국왕과 선비들이 이른바 사서오경을 읽더라도 천하국가를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 제대로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천하국가를 하나의 개념적 틀로 받아들이고 연구하기보다 ‘천하’와 ‘국가’를 나눠 사유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등 일부 학자들만 단편적으로 천하국가의 관념을 고민했을 뿐이다. 조선은 줄곧 중국의 제후국을 자청, 스스로를 격하하면서 천하국가의 주체가 되기보다 제후국에 편입되는 외교정책을 추구했다. 국정 운영의 철학도 이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1세기 한국의 국정 운영은 일국체제를 넘어 천하국가의 틀이 요구된다. 한 해 정부 예산 중에서 2조4000억원 정도가 대외경제협력기금(EDCF)과 해외원조(ODA)에 쓰이며, 국제교류재단을 통해서는 8000억원의 무상원조가 집행된다. 이 정책들의 아이디어는 보편 인류의 관점이지만, 정치인과 관료들은 여전히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이 촛불 민주주의로 21세기 민주와 인권의 선도국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일국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이 정책을 바라봐야 한다.

일국주의의 토대 위에선 라파즈 모자 보건병원

산타 크루즈 인근 리오그란데 강의 ‘파이롱 다리(Pailon Puente)’. 한국의 원조로 새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사진에서처럼 좁은 다리를 이용해 양쪽에서 차량들이 차례로 왕래해야 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일국주의 시각으로 원조를 집행한 대표적 사례가 알토 라파즈의 모자 보건병원 지원이다. 2008년 이명박정부는 우유니 소금사막과 코이파사 호수에 매장된 리튬을 확보하려고 볼리비아 정부에 다양한 형태의 유·무상 원조를 했다. 유상원조는 교량 건설을 지원하는 형태였다. 산타 크루즈(Santa Cruz) 인근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에 새 다리를 놓는 것은 산타 크루즈의 숙원 사업이었다. 100m가 넘는 강폭을 지닌 곳에서 다리라고는 차 한 대가 갈 겨우 낡은 교량만 있었다. 경찰이 깃발을 들고 차량 운행을 지시해야만 반대편 차량이 지나갈 정도였다. 산타 크루즈라는 도시가 커지면서 차량이 늘어나고 매일 아침부터 다리를 사이에 두고 양방향에서 교통 정체가 시작되는 등 만성적인 골치였다. 이에 MB정부에서 차관자금을 통해 벽산건설이 현대적인 교량을 건설했다.

이명박정부에서 모자 보건병원을 지원한 알토 라파즈 지역은 안데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다. 라틴 아메리카 최빈국 볼리비아에서도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1970년대 한국처럼 이촌향도가 벌어졌다. 안데스 시골에 사는 인디오들이 가족 단위로 대도시로 옮겨와 정착한 가난한 슬럼가가 알토 라파즈 지역이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La Paz) 중심가는 해발 3600m 정도며, 남쪽 저지대는 3250m 정도로 주로 외국 대사관 직원들과 다국적 기업 종사자들이 산다. 이 지역은 라파즈의 부촌에 해당한다. 반면 농촌에서 온 가난한 사람들은 고도가 높은 알토 라파즈에 살고 있다. 부자들은 고도가 낮아 호흡하기 편한 곳에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고도가 높아 호흡이 불편하고 라파즈 공항이 있어 비행기 소음까지 심한 곳에서 무허가촌을 형성했다.

저소득 빈곤층이 사는 곳에서 가장 큰 문제는 상수도와 교육, 그리고 위생과 건강이다. 알토 라파즈 역시 약품과 의료진이 늘 부족했다. 이에 자원외교에 열을 올린 이명박정부는 볼리비아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의 정치적 기반인 이곳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알토 라파즈 모자 보건병원을 지원하게 됐다. 지원 동기가 어떻든 이 병원으로 알토 라파즈 지역 인디오들은 보다 많은 의료 혜택을 보게 됐다.

알토 라파즈에 있는 ‘모자 보건병원’. 한국 국제교류재단 지원으로 운영되는 이 병원은 가난한 인디오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과라요스 한인들의 공유가치성장을 위한 시도

볼리비아 원조에서 특히 눈에 띄는 사례는 과라요스(Guarayos) 지역의 상수도 지원사업이다. 전형적 농촌인 과라요스는 당시 물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곳 시장은 2000년에 한국국제협력단 페루 사무소가 볼리비아에서 상수도 시설을 지원한다는 공고를 보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간 진행이 지지부진했었다. 그런데 MB정부가 자원외교에 공을 들이면서 뜻하지 않게 과라요스 상수도 사업이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과라요스에 사는 일부 농장주들은 관정을 뚫어 지하수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과라요스는 우기 때 물을 가둘 수 있는 조그만 식수용 댐을 건설해달라고 요청했고, MB정부는 상수도 시설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사실 과라요스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에는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정략적 목적도 있었다. 대도시에 사는 에스파냐계 후손들이 자신에게 반대하면서 분리독립까지 추진하자 상수도 지원 등을 통해 농촌 인디오들을 규합, 지지층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볼리비아 원조의 동기와 목적이 제각각이었던 한국 정부에 대해 시간이 흐른 뒤 볼리비아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대답은 ‘글쎄’다. 볼리비아 정부는 자국의 리튬에 눈독을 들인 채 원조를 하는 MB정부에 대해서 의구심을 놓지 않았다. 도움은 받지만 그 의도를 선의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원조가 양국의 건강한 연대의식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이유다. 양국의 관계는 서로 너무 다른 계산 탓에 필요에 의한 거래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이명박정부 역시 볼리비아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도 리튬 연구와 개발에서 실질적인 공동연구나 협력적 개발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자원개발은 개발대로 실패했고 원조도 많은 자금을 투자한 것과 달리 선의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는 비단 이명박정부에 한정된 것만 아니다. 일국주의 관점을 넘어서 보편적 관점에서 해외원조를 추진하는 게 장차 한국 정부와 민간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이는 UN과 글로벌 비정부기구 등 국제사회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볼리비아 한인들이 과라요스의 여성 시장에게 컴퓨터를 기부하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한국 정부가 과라요스 상수도 지원사업을 하고 있을 무렵에 볼리비아 한인들은 다른 모임에서는 과라요스의 교육과 보건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었다. 이 모임은 일국주의 관점에서 원조를 추진한 이명박정부와 달리 보편주의적 시각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고려하는 입장이었다. 이 모임은 과라요스에 컴퓨터 등을 지원하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민간 조직에서 진행된 지원이라 규모와 내용은 빈약했지만 국가주의나 개별 기업의 이익을 넘어선 보편주의적 접근 방식으로 상호 교류를 추진했다. 그 정신을 인디오들도 공감했기 때문에 상호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다.

글로벌 인권과 평화포럼 개최를 정례화

2017년 촛불 민주주의는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국제연합(UN) 평화의 날인 9월21일에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대비되는 ‘글로벌 인권과 평화포럼’이 기획 중이다. 매년 1월 다보스에서 열린 포럼이 경제적 이슈로 세계적 관심을 모은다면,  날씨 좋은 가을날 한국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 문제로 가지고 세계적인 공론장을 만드는 기획이 진행되고 있다. 촛불 민주주의는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21세기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를 그 정신으로 품고 있다. 이 새로운 민주주의가 글로벌 차원에서 공감을 얻는 첫 번째 조건은 좁은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보편주의의 뿌리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나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사유에서 찾아낼 수 있다. ‘중용’의 ‘천하국가’는 21세기 인류의 보편주의에 대한 철학적 기초다. 이미 3000년 전에 동아시아에서는 21세기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주의적 가치를 제시한 것이다. 그간 한국은 국가주의적 사유에만 빠져 보편 인류라는 관점에 소홀했다. 동아시아 고전에 적힌 텍스트대로 천하국가를 해석해 낼 수 있다면 서양의 보편주의가 아닌 고유한 보편주의의 정신적 토양을 일궈낼 수 있다.

천하국가는 먼 곳에 있는 전문가들도 올 수 있게 열린 정책을 추진하고 볼리비아처럼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해 그들이 한국을 찾고 싶게 하고 세상의 모든 나라까지 품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동아시아 고전은 보편주의가 수신을 통해 자기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역설한다. 촛불 민주주의는 반체제 정치가 성행한 21세기에 새로운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매년 9월이 되면 세계 시민들의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의 공론장이 열릴 수 있다. 촛불 민주주의를 통해 글로벌 인권과 평화라는 국가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내년 12월10일이면 5년에 한번 있는 UN 인권상이 수여되는데, 1700만명의 촛불시민들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촛불 민주주의를 세계 시민들에게 잘 알려서 이 상을 받게 되길 희망한다. 이는 국가주의를 넘어서 보편 인류의 촛불 민주주의로 승화할 때 가능할 것이다.

볼리비아 한인들이 안데스 저지대 인디오들이 거주하는 과라요스에서 양국의 공유가치성장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협력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