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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한국의 시민입법 : 걸어온 길, 걸어갈 길/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06 1월 [IF Media] 한국의 시민입법 : 걸어온 길, 걸어갈 길/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한국의 시민입법 : 걸어온 길, 걸어갈 길

출처 : 열린충남 2016년 12월호

시민은 입법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시민은 입법주체로서 당위적 지위를 부여 받곤 한다. 그러나 현실의 시민들 가운데 스스로를 입법주체로 여기거나, 그러한 지위를 직접 경험한 이는 막상 별로 없다. 시민은 입법주체이기보다 오히려 입법대상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법들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바뀌고, 폐지되지만, 그것이 어떤 이유와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지에 대한 설명과 정보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들이 입법의 수동적 대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1987년 이후 약 30 여 년 동안 한국의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입법의 능동적 주체임을 증명하고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벌여 왔다. 이를 ‘시민입법’이라 부를 수 있고, 일종의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시민입법운동은 몇 단계를 거치며 변화해 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 김영삼 정부 전반기인 1994년까지는 시민입법의 ‘등장’ 시기였다. 민주화에 대한 시민적 열망은 뜨거웠지만, 구체적 입법의 형태로 제안하고 주도할 역량은 국회나 시민사회 모두 충분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노태우와 김영삼 대통령, 그리고 행정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입법’이 더 많았다. 의원발의보다는 정부제출 법안이 많았고, 입법청원은 시민단체보다 개인이나 개인들의 연명으로 이뤄졌다. 입법부나 행정부 등 제도정치를 압박할 수 있는 운동정치의 수단도 충분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의 소개를 얻어 청원을 제출하더라도, 그와 관련된 의원발의나 정부제출 법안이 따라 나오지 않아 입법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임기만료 폐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 후반기부터 김대중 정부 기간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입법’ 시대였다. 시민입법운동의 ‘성장’이 이뤄졌다. 부패방지법 제정을 비롯한 실질적 입법적 성과 또한 적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자신들이 제출했던 107건의 청원 가운데 64건이 입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했다. 이 시기에는 참여연대나 경실련,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시민입법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국회의원의 소개를 얻어 입법청원을 내는 것을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삼았고, 집회와 시위, 기자회견, 보도자료 배포 등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국회의원과 정당을 압박했다. 지금은 이미 일반화된 국회의원 의정활동에 대한 모니터링과 발표, 의원평가 등의 방식도 이 때 개발되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의 낙선운동은 이와 같은 ‘권력감시’와 ‘시민입법’이 결합된 대표적 사례였다. 시민단체의 입법적 요구에 대해 국회와 정부 모두 적극적, 호의적으로 대응했던 시기였다.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 10년 동안 시민입법운동은 ‘정체’와 ‘전환’을 맞이했다. 우선 그간 시민입법의 주된 형태였던 입법청원이 급감하고 의원발의가 급증했다. 16대 국회에서 1,651건에 불과했던 의원발의 건수는 17대 국회 5,728건, 18대 국회 11,191건, 19대 국회 15,444건으로 폭증한다. 입법청원 건수는 765건(16대), 432건917대), 272건(18대), 227건(19대)으로 계속 줄어든다. 이는 국회와 시민사회,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그리고 시민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이 국회 다수를 점했던 참여정부 시기부터 입법과정에서 국회의원의 역할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시민입법의 의제와 성과가 ‘흡수’당한 셈이다.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이 의회 다수당이 된 이명박 정부에서도 의원발의는 계속 늘었다. 그러나 소수야당의 정치적 한계와 시민단체에 대한 정부의 억압적 대응이 계속되면서 시민입법은 크게 위축되었다. 입법과정으로부터 ‘배제’된 셈이다. 이런 와중에 시민과 국회의원을 직접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민간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는 2007년 15명, 2008년 38명의 국회의원을 모아 ‘호민관 클럽’을 만들었고, 다양한 시민제안(시민창안)이 입법되도록 도왔다. 희망제작소는 시민들의 의견을 국회의원에게 ‘전달’하는 수준의 중개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같은 중간매개 없이 시민이 직접 국회의원과 접촉하고, 함께 하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여대야소’의 19대 국회가, 그리고 ‘여소야대’의 20대 국회가 구성되었다. 시민사회에 대한 정부의 억압적 성격은 여전했고, 여야간 갈등은 심했지만, 국회선진화법때문에 ‘날치기’ 통과는 어려워졌다. 이 시기 시민입법운동도 ‘진화’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개별 의원실 차원을 넘어 시민단체와 의원실, 정당 사이의 조직적 협력이 강화되었다. 19대 국회에서부터 시민단체 출신 국회의원 숫자가 늘었고, 이들은 ‘시민정치포럼’을 결성했다. 시민단체들의 다양한 입법적 요구를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여러 형태의 협력이 시도되었다. 또한 시민들에게 국회를 개방하고, 입법과정을 좀 더 경험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열려라 국회, 통하라 정치’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20대 국회에서 시민정치포럼은 다시 결성되었고, ‘국회톡톡’과 같은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계속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시민입법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을’로서의 당사자들(개인과 단체)과 시민단체, 의원실, 정당이 지속적 협력을 통해 입법적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입법운동의 진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터넷과 모바일에서의 기술혁신의 도움으로 전혀 다른 모델이 시험되고 있다. GMO완전표시제법 통과를 목표로 삼는 온라인 프로젝트 정당 ‘나는 알아야겠당’이 2016년 창당했다. 인터넷에 존재하는 가상정당이지만, 입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실제 모임도 활발하다. 이는 빠흐티와 같은 플랫폼 개발자들이 참여하면서 가능했다. 더욱 광범위한 입법의제에 대해 국회의원과 시민이 만나고, 힘을 합쳐 입법과정에 참여하는 ‘국회톡톡’이라는 시민입법 플랫폼도 개발되었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국회톡톡’에 접속한 시민들은 쉽게 입법에 관한 정보를 얻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1,000명 이상의 지지를 얻으면 해당 상임위 국회의원들에게 입법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국회의원이 이에 응답하면 국회의원과 시민이 ‘입법드림팀’을 만들어 입법과정 전체를 같이 이끌어 가는 구조이다. 와글이나 더미래연구소, 빠흐티 등이 ‘국회톡톡’ 개발을 주도했지만, 이들은 중간매개조직이 아니다. 시민들은 온라잇 플랫폼의 기술적 진화를 이용해 입법과정 내내 정보를 의원실로부터 제공받고, 입법과정에 대한 참여를 쉽게 조직할 수 있다. 기술혁신이 가능케 한 진화이다.

이미 핀란드와 독일 등 많은 나라들에서 시민입법권은 제도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 한국 에서도 청원법 개정 등을 통해 시민입법이 보다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개선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기술혁신과 열정, 아이디어를 조합하여 시민 스스로 입법주체로 거듭나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 셈이다. 과연 언제, 어떤 식으로 입법적 성과를 거둘 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대와 달리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당연히 실망과 불만도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지난 30 여 년 간 시민입법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때 앞으로 ‘걸어갈 길’의 첫걸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면 좋을지 전혀 모른 채 시작하는 여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기술혁신과 제도변화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함께 간다’는 사실이다. ‘시민입법’은 결코 혼자서 걸을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