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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공화주의적 계기에서 대통령 퇴진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09 11월 [IF Media] 공화주의적 계기에서 대통령 퇴진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시론)공화주의적 계기에서 대통령 퇴진

출처 : 뉴스토마토

지금 대한민국은 시민 대집회가 열리는 ‘마키아벨리적 계기(Machiavellian Moment)’ 속에 있다. 광장정치는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2선 후퇴와 거국 중립내각의 목소리는 시민들의 열정 속에 점점 묻혀가고 있다. 지난 토요일을 기점으로 국회와 시민 대집회의 이중권력 시대가 열렸다. 주말에 광화문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대통령의 퇴진과 하야를 외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미 95%의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주최 측 추산으로는 20만명의 시민들이 광화문 집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20만명의 시민들이 평화로운 광장에 모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87년 6월 항쟁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과 싸웠던 광경과는 전혀 다른 시민행동이다. 자유스런 축제 분위기에서 일상의 삶을 사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 공화적 에토스가 분출되는 것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6년 만의 일이다. 새로운 공화정치가 시작되고 있다.

이런 시민적 공화주의(Civic Republicanism)가 분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장소에서 아무 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세계사에서도 공화적 시민행동은 포에니 전쟁 전후 삼두정치가 끝날 때까지 로마 공화정에서 발화하였다. 아테네 민주정치 이후 긴 간막극을 지나 로마에서 나타났고, 어두운 암흑기를 지나 15~16세기 피렌체 도시 공화정에서 재점화됐다. 포칵(J. Pocock)은 이 도시 공화정이 17~18세기에 대서양 양안에 있는 영국과 미국에서 연속적으로 계승되었다는 입장이다. 이 근대 공화정이 중세의 긴 암흑기를 지나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과 대서양 양안에 나타나서 새로운 시민의 시대를 만든 것을 ‘마키아벨리적 계기’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정이 어떻게 영국에 이식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 이탈리아 도시 공동체와 대서양 공화주의를 잇는 끈은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이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시민혁명의 운명(Fortuna)에 대해 덕성(Virtus)을 발휘해 새로운 공화정치를 만들어 가는 것으로 믿었다. 이 시민들은 도시 공화정을 타락시키는 것이 바로 권력자의 부패라고 보았다. 영국에서는 정치적 대립을 이탈리아적인 운명 대신에 ‘부패와 덕성’으로 반부패 운동을 전개했다. 피렌체 도시 공화정과 영국의 공화정치에서는 권력자가 공적인 일을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것을 최악의 부패로 경계했다.

이러한 공화주의적 계기가 대한민국에서 분출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사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2008년 촛불집회에 나온 여고생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시민적 덕성을 일깨웠다. 그리고 2016년 광화문 광장의 시민 대집회에서 등장하는 공화적 에토스도 시민적 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고 있다. 권력자가 사적 이익을 위해 국가 권력을 남용한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 광장에 모인 20만 시민들의 요구는 대통령의 퇴진으로, 이미 시민적 공론을 형성했다. 사적 이익을 위해 국가 권력을 비선 실세들과 남용한 것을 시민들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시민적 덕성으로는 국가 권력을 사적 편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오용한 부패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1494년의 피렌체 도시 공화정이나 미국 건국 아버지들보다 공권력의 부패에 대해 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들은 광장에서 한목소리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다.

반면 정치권에서는 즉각적인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입장과 대통령의 2선 퇴진을 전제로 거국 중립내각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양분되어 있다. 아직 제도정치에서는 절차적인 이유를 들어 거국 중립내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시민 대집회에서 외치는 대통령 퇴진 요구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제도권 정치와 광장 정치의 간극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은 대통령이나 측근의 비리를 문제 삼는 일상적인 반정부 집회를 넘어 새로운 시민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전환적 순간이다. 공화적 에토스가 발화한 시민적 힘은 대통령의 하야까지 더 거세게 분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공화적 에너지로 분출되고 있는 역동성은 87년 민주화나 2008년 촛불집회보다 더 큰 세계사적 변화이다.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