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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과잠’의 기억 /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26 5월 [IF Media] ‘과잠’의 기억 /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이관후 칼럼] ‘과잠’의 기억

우리가 열광하는 것이 정치의 전부는 아니다

출처 : 프레시안
2년 전,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들을 가르치는 과목에서 과제를 내 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에 대해 짧은 글을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프랑스 학생이 쓴 글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 학생은 한국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점퍼를 입는다는 사실을 꼽았습니다. 색깔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속을 적은 등판의 글씨체까지 완전히 똑 같은 야구점퍼, 일명 ‘과잠’을 입고 다닌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 역시 그 전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것이었는데, 그 학생의 글을 보고 난 다음부터는 실로 이 거대한 ‘몰개성’의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대학생은 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한 사회에서 대학생들의 다양성과 창의성은 그 사회 전체의 살아 있는 정신과 자유의 수준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한국 대학생들의 과잠은 이 사회가 얼마나 획일주의에 길들여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하철에서 모두가 같은 점퍼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끔찍함을 느낀다.’

혹시, 이 글을 쓴 친구가 서구우월주의적 시각을 갖고 한국사회를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일부러 그 학생을 불러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학생은 한국의 거의 모든 것을 좋아했습니다. 경제적으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어떤 나라에서도 이렇게 다정다감한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으며, 한국은 생동감이 넘치고 너무나 매력적인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 나라에서 딱 하나 빠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개성과 다양성을 억압하는 기묘한 분위기의 획일주의라고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한국사회를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가장 내밀한 인간의 사생활에서 벌어진,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은 어떤 개인적 행위에 대해 법정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탄압했습니다. 그런데 비단 그런 것들 뿐 일까요?

‘신성’으로서의 정치

칼 슈미트는,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명백하게 나타나는 순간에 비로소 본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한 사회 내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을 엉성한 타협으로, 그리고 실제로는 타협이 이루어지지도 않은 채로 그런 흉내만 내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을 기만하는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주장, 혹은 반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는 ‘신학’으로서의 정치입니다. 저는 이것을 보다 쉬운 말로 종교로서의 정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실 모든 정치는 종교성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란 원래 종교와 더불어 생겨났고, 아마 그 후로도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 신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고,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내며, 숭고한 목적을 위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치는 늘 이러한 힘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페리클레스가 <전몰자 추도 연설>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의 이름으로 전사자들을 칭송한 것이나, 루소가 새로운 사회계약을 통해 수립된 공화국의 유지를 위해 시민종교를 강조한 것은, 모두 애국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종교성에 기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정치가 본질적으로 종교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종교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듯, 그것은 정치를 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주장입니다.

정치가 소수의 철학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 교리의 수준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지기 마련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과 반야심경을 외는 모든 신자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듯이, 내가 어떤 정당의 강령과 정책을 다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에서, 로마에서, 그리고 기실 동서양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정치인들은 늘 대중에게 모종의 신적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문명 수준이 낮아서 발생한 일이라기보다는 정치의 본질적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의 속성은 대표를 통한 민주주의에서 오히려 더욱 잘 드러납니다. 정치적 대표를 인민이 선출하거나 만들었다는 신성한 관념이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정치인들과 악수를 하고, 손을 잡으려고 하고, 사진을 찍고, 그의 등장에 환호를 지르는 것은, 고래로부터 내려왔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더욱 강화된 정치의 본질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정책적 이해관계나 신념을 통해 경쟁한 후보들 중에서 한 명의 대표자가 선출되면, 그 대표자가 다른 이해관계나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모두 대표한다고 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비논리적인 하나의 ‘관념’이 가능한 것도 바로 그러한 신성성 때문입니다.

정치라는 시지프스의 운명

세월호와 관련된 모든 조사, 곧 그 배가 처음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고, 어떻게 침몰했으며, 왜 구조에 문제가 있었고, 이러한 조사를 은폐하려는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밝히려는 이유가 박근혜가 미워서라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4대강 사업을 다시 조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업이 환경을 파괴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사업의 과정에서 국민을 기만하거나 부정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환경이 좀 파괴되더라도 경제가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물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고, 이성이 감정을 압도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모든 일을 감정에 따라 처리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홍준표 후보를 찍은 사람들이 문재인 후보를 찍은 사람들을 상대로 ‘종북좌파 빨갱이들에게 속아 넘어간 멍청한 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해봐야 술자리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지, 공공을 상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편에서 ‘돼지발정제를 찍은 꼴통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혐오 표현에 불과하지 공적 자유의 범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어떠한 선호나 신념을 공유함으로써 일정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념과 선호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호나 신념은 당연히 그 자신에게 좋아 보이거나 옳은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형태의 과잠이 좋아서 입든 유행이라서 입든, 그러한 획일주의가 은연중에 내 것의 좋음, 나의 옳음으로 발현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종교적 속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정치에서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니 그러한 일을 자연스러운 어떤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누구에게든 필요합니다.

정치는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그림은 아닙니다. 한쪽에는 괴물이 출현하고, 다른 쪽에서는 선함을 노래하며, 그 중간에서는 협잡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뒷돈을 대고 있는 고리대금업자와 그를 위해 일하는 근면한 일꾼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신과 악마들이 한 폭에 담겨있습니다.

이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완전히 박멸해버리려는 정치적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제임스 매디슨이 말했듯이, 모든 인간이 천사라면 정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미대선으로 새정부가 탄생하고 얼마간 정치는 우리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치란 견디어 내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견디어 내면서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겨우 조금씩 앞으로 밀어 올릴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이미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내려 진 가혹한 시지프스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인간들에게 불을 내주어 영원토록 고통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이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라는 사실에서, 모두가 조금은 위로를 받기를 바랍니다.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