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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누가 ‘잠룡들의 싱크탱크’에 참여하는가/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28 10월 [IF Media]누가 ‘잠룡들의 싱크탱크’에 참여하는가/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홍일표의 미래정치] 누가 ‘잠룡들의 싱크탱크’에 참여하는가

출처 : the300

미국은 ‘싱크탱크의 나라’다. 싱크탱크의 숫자만이 아니라 주요 싱크탱크들의 세계적 명성, 미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 등 여러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미국 싱크탱크의 역사와 유형은 보통 네 가지로 구분된다.

‘학생 없는 대학’이라 불리며 정책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확립했던 싱크탱크 1세대. 브루킹스연구소, 외교관계평의회 등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의 방대한 정책적 수요에 부응하며 만들어진 2세대. 랜드나 도시연구소 등은 방대한 규모의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2세대 싱크탱크를 대표하게 된다.

의회, 행정부처, 그리고 언론에 영향을 미치며 정치적 주창조직으로서의 성격을 확실히 드러낸 헤리티지재단이나 케이토연구소 등이 3세대 싱크탱크다.

지금까지 미국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싱크탱크들은 대체로 3세대 싱크탱크들이라 할 수 있으며, ‘오바마 싱크탱크’라 불렸던 미국진보센터나 ‘힐러리 싱크탱크’로서 역할이 기대되는 루스벨트연구소도 넓게 보면 여기에 포함된다.

미국 싱크탱크의 대표적 연구자 도널드 아벨슨은 1990년대 이후 ‘선거 후보자 지원용’ 또는 ‘정치인 장식품’ 싱크탱크의 부상을 주목하며 이를 네 번째 유형으로 분류한다.

1992년 무소속 돌풍을 일으켰던 로스 페로가 만든 ‘우리가 발 딛고 선 곳에서의 단결’,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이 내걸었던 ‘미국과의 계약’에 영향을 미친 ‘진보와 자유 재단’, 밥 돌 전 상원의원을 도왔던 ‘더 나은 미국 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특정 정치인의 선거 승리를 위해 만들어졌고, 존속기간 자체가 그리 길지 않다는 점에서 다른 미국 싱크탱크들과 구별된다(언급된 싱크탱크들 가운데 웹사이트가 남아 있는 것은 ‘진보와 자유 재단’ 정도이며 그마저 2010년 10월 1일자로 활동이 종료되었다). 이러한 단명의 ‘정치인 장식품’ 싱크탱크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정책역량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급조된 자원동원용 싱크탱크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한국 싱크탱크들은 어떤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유력 정치인의 싱크탱크 설립은 한국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국제정책연구원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국가미래연구원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2012년 당시 담쟁이포럼이라는 외곽조직을 뒀고, 손학규 전 대표의 동아시아미래재단은 비교적 역사가 긴 편이다.

최근 김무성 전 대표도 지난 9월 ‘공정사회연대’라는 원외 싱크탱크를 출범시킨 것으로 알려 졌다. 안철수 전 대표의 정책네트워크 내일이나 안희정 충남지사를 돕는 것으로 알려진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도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외곽 싱크탱크로 흔히 희망새물결이 거론된다. 최근 가장 주목받은 것은 문재인 전 대표가 이끄는 ‘정책공간 국민성장’의 출범이다. 1차 발기인으로 이미 500여명의 교수진이 참여했고, 연말까지 1000명 이상으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러한 규모는 그간의 다른 어떤 싱크탱크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이다.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로 알려졌던 국가미래연구원의 2010년 출범 당시 발기인이 78명이었고, 다음해까지 1차 정회원 숫자가 200명 정도였다. 2013년 출범한 안철수 의원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발기인 숫자는 52명이었다. 대선을 7개월여 앞둔 2012년 5월 출범했던 담쟁이포럼의 발기인 규모도 260여명 정도였다. 대선 이후 담쟁이포럼의 활동은 거의 없었다. 2017년 대선을 1년 이상 앞둔 시점에 ‘문재인의 싱크탱크’임을 명확히 밝힌 정책공간 국민성장이 출범했다. 규모는 커졌고, 출범은 앞당겨졌으며, 관계도 분명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제대로 된 정책경쟁을 준비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만큼 ‘국민성장’이라는 싱크탱크에 대한 관심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몇 가지 점에서 의문과 우려를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500명과 1000명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발기인 숫자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게 숫자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문재인 대세론’을 지나치게 정당화하려 한다는 비판이다. 특정 정치인을 돕거나 연계된 싱크탱크라 하더라도 최소한 발기인 명단은 늘 발표되었다(언론검색을 한번만 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민성장’은 그렇지 않았다. 십여명 정도의 핵심 연구자 명단은 공개되었지만 500명 발기인이 누군지 지금까지 알 수 없다. 그저 500이나 1000이라는 숫자만 있을 뿐이다. 싱크탱크의 정체성과 수준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누가’ 참여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는 점에 비춰 볼 때 이례적이다.

미국 싱크탱크 연구자들은 ‘아이디어 전장(戰場)’과 ‘아이디어 시장(市場)’에서 공개적이고 치열한 경쟁과 검증 과정을 거쳐 ‘영향력’과 ‘자리’를 얻게 된다. 그것이 싱크탱크가 오랜 세월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올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다.

연구 성과의 객관성에 대한 학계의 의심과 비판에 대해 “당신들 논문은 겨우 3명의 동료가 읽고 평가하지만, 우리 아이디어는 매일같이 수많은 독자들에 의해 공개검증을 받고 있다”며 싱크탱크 연구자들은 반박한다. 그러나 ‘싱크탱크 정치’에 있어서 불투명한 자원동원이나 은밀한 거래는 감시대상이다. 올 8월 뉴욕 타임즈가 미국 싱크탱크와 소속 연구자들의 ‘친기업’적 행태를 신랄히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표방하지만 일부 기업의 이익을 과도하게 대변하고 있음을 심층적으로 파헤친 특집이었다. 이와 같은 공개적 경쟁과 치밀한 검증을 통해 ‘평가받지 않는 지식권력’의 객관성을 높이고, 위험성을 줄이게 된다. ‘무엇’을, ‘왜’, ‘어떻게’ 까지 다 따질 정도이기에 ‘누가’는 알아야 할 기본이자 기초 정보에 불과하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였던 국가미래연구원은 박근혜 정부 초기 ‘낙하산 인사’나 ‘회전문 인사’의 주요 원천으로 주목받았다. 이와 관련된 논란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자들의 면면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인사와 정책 방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싱크탱크, 특히 ‘문재인의 싱크탱크’를 천명한 ‘국민성장’의 500여 발기인 명단을 소문과 탐문을 통해 겨우 일부라도 알 수 있는 상황은 이해하기 어렵다. 명단 공개가 괜한 오해와 혼란을 빚고, 연구 성과의 객관성을 자칫 의심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면 그것은 우려스런 인식이다.

국민들이 우선 궁금해 하는 것은 500이나 1000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누가’ 참여하는가이다. 그를 통해 국민들은 싱크탱크의 성격과 실력을 이해하고, 정책에 대한 신뢰를 쌓게 된다. 이는 잠룡들의 싱크탱크 모두에 해당된다. ‘후보캠프 정책단위’가 아니라 ‘싱크탱크’를 표방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자 국민에게 제공되어야 할 기본적인 정보이기 때문이다.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