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1월 [IF Media] 대통령은 몰랐고, 우리는 알았던 우리나라 /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국민 통합’ 공약 실천한 박근혜, 하야하라!
출처 : 프레시안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Our unknown country).”
미국 대선이 트럼프 승리로 치닫던 밤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 대학교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의 대표 칼럼니스트 그리고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확신했던 그였기에 트럼프 당선의 충격과 좌절이 정말 컸던 모양이다.
그는 글에서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읽지 못했음에 대한 후회를 토로했다. 도시 외곽 백인 남성들이 “우리의 이상”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끔직한 폭로의 밤”이 왔음을 절망스러워 했다. 선거가 끝났지만 “당신은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트럼프 시대’가 가져 올 후퇴와 추락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비단 미국(민)만의 것도 아니다. 궁금하다. 크루그먼은 과연 ‘그의 나라’에 대해 몰랐을까? 트럼프에 열광한 ‘그의 이웃’에 대해 정말 몰랐을까?
미국 최고 권위의 사회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로버트 퍼트남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우리 아이들 : 위기의 아메리칸 드림>(한국에선 <우리 아이들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로 2016년 번역, 출간되었다)을 작년에 출간했다. 그는 ‘사회 자본(social capital)’ 개념을 사용해 미국 시민 사회의 변동과 쇠퇴를 분석했고 그의 저서 <나 홀로 볼링>은 이미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다.
퍼트남은 자신의 고향 오하이오 주 포트클린턴에 대한 깊이 있는 양적·질적 연구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미국 사회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그가 분석한 오하이오 주는 미국 대선에서 중요하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오하이오에서 승리한 후보가 모두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역시 그곳에서 승리했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퍼트남은 이 책에서 “우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그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그들이 바로 폴 크루그먼이 몰랐다고 말한 ‘그의 이웃’이다.
폴 크루그먼이 퍼트남의 책을 읽지 않았을 리 없다. 힐러리도 ‘다른 사람’들을 몰랐을 리 없다. 힐러리 곁에는 더욱이 버니 샌더스도 있었고, 엘리자베스 워렌도 있었고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있었다. 그들이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불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미국민들의 불만과 불신이 얼마나 강렬한지 모를 리 없다. 그들 모두 그것을 말했다.
그렇지만 민주당은 샌더스가 아니라 힐러리를 택했다. 트럼프에 대한 불안만큼 샌더스에 대한 불신이 컸던 셈이다. 민주당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힐러리를 선택했고, 힐러리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트럼프에게 진 것이다. 크루그먼은 “이 나라가 인종적 편견과 여성 혐오에서 한참 벗어났다고 할 순 없지만 훨씬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사회가 됐다고 여겼는데, 선거 결과는 ‘우리’가 틀린 것으로 나타났다”고 뒤늦게 한탄했다. ‘설마’ 했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어떤 ‘설마’도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음을 한국 사회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은 한국에서 먼저 나왔어야 할 법하다. ‘압축적 근대화’라 불릴 정도로 한국 사회의 빠른 근대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그간 적지 않았다. ‘근대의 공과’를 넘어서고자 하는 ‘탈근대’나 ‘포스트모던’에 대한 문제의식은 학술 용어만은 아닐 정도였다. 그랬기에 2016년 한국에서 대통령과 연계해서 ‘주술’과 ‘무속’, ‘사이비 종교’와 ‘굿’, ‘교주’와 ‘무당’이라는 단어들이 난무할 것을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비선 실세’라는 말은 오히려 근대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들릴 지경이다.
막스 베버가 말했던 ‘탈주술화로서 근대화’ 개념을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지금 ‘근대 이전’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강고할 줄 알았던 민주주의와 관료제 모두 취약하기 그지없음도 확인되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대통령만이 아니라,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던 제도와 질서 모두가 ‘껍데기’에 불과했다. 최순실에 조종되었던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이 멈추질 않는다. 정말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가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을 기대하기 만무하다. 국민들은 참담함과 부끄러움, 배신감과 불안함이 뒤섞인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잠이 보약”이라며 여전히 밝은 표정과 맑은 눈을 자랑하는 ‘기괴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욱이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보다도 ‘나라 사랑’과 ‘애국심’을 강조했다. 지금 상황을 이유로 대통령의 그런 진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통령의 나라”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민이 서로 ‘다른 나라’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았던 우리나라”는 어디에 있나? 그것은 광장에 있었고, 거리에 있었다. 1960년에 있었고, 1987년, 2002년, 2004년, 2008년에 있었던 그곳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1월 4일 대국민 담화에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자괴감이 든다”며 불편한 심경을 그대로 토로했다. 2016년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꿈꾸고 사랑했던 나라’가 아닌 셈이다. 지난 12일 밤에는 100만 개가 넘는 촛불이 광장과 거리를 뒤덮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새누리는 해체하라”는 구호가 전국에서 울려 퍼졌다. 누군가는 춤을 추었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다. 남녀노소, 경향 각지의 예외가 없었다. ‘헬조선’에서 날마다 고통 받던 ‘우리 국민들’과 ‘우리 아이들’이 ‘우리나라’를 되찾겠다고 광장과 거리로 모였다.
“우리가 알았던 나라”, “우리가 사랑하는 나라”는 바로 거기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나. 자신감이 생긴다”라고 말해 주고 싶다. 결론은 명확하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뽑았다. ‘다른 나라’의 대통령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래서 ‘하야’는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그것이야말로, 의도치 않게 이뤄낸 ‘국민대통합’에 이은 대통령의 마지막 공약이행이 되어야 한다.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