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12월 [IF Media] 민주공화국, 미완의 백년 고독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시론)민주공화국, 미완의 백년 고독
출처 : 뉴스토마토
단테는 그의 도시 피렌체를 ‘신음하는 환자’라고 자조했다. 그는 예술과 문예에 뛰어났지만 언제나 낙제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피렌체의 정치에 절망했다. 그러나 불과 1세기 후에 피렌체에서는 인류에게 지금까지도 지적 영감을 주는 근대 도시공화정이 찬연하게 발화했다. 시민들이 외부의 독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하나의 공동체임을 깨닫게 되고, 시민의식이 자라나서 근대 시민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100여년 전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독립지사들이 지금 광화문에서 매주 주말 100만명이 모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지켜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지난 10월29일에 제1차 시민대집회가 열린 후 지난 주말 제8차까지 연인원 822만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50일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평균 100만명의 시민들이 모여서 민주공화국을 자각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여정을 대한민국에서 시작하고 있다. 100여년 전 독립지사들은 이런 장대한 세계사적 서사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지사들은 단테와 같은 심정으로 자신의 조국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퇴락한 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상해에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으로 선포했지만 그 심정은 자못 비감했을 것 같다. 일본은 메이지 헌법으로 입헌군주제 국가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개조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중국은 손문이 신해혁명으로 1912년에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통해 군주제가 아닌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있었다. 이 공화정체의 선언은 아시아 국가들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단테가 자신의 도시에서 추방되어 비감한 심정으로 그의 조국을 신음하는 환자에 비유하면서 낙담했듯이 임정의 독립지사들도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피난 살림을 꾸린 옹색한 망명정부에서 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정을 선포할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 독립지사들은 봉건적 군주제와 일제의 식민지배를 거부하고 새로운 공화정체의 대한민국을 꿈꾸었다. 그들은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된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를 서구의 공화정체들을 참고해서 새롭게 설계했다. 군주제를 거부한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대통령제를 만들었고,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휘그(Whig)들은 상징적인 군왕만 남겨두고 내각책임제를 고안해냈다. 대한민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손문의 임시약법을 참고해서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혼합한 동아시아적인 공화정체로서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를 만들었다. 이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이원적 권위를 인정하는 헌정체제였다.
이 헌정체제는 1948년 제헌헌법에서도 그대로 수용됐다.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이승만 세력과 의회제를 선호하는 한민당 세력 사이에서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한을 배분하는 동아시아적인 공화정체가 헌법에 명문화됐다.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에 들어 있던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하루 만에 졸속으로 바꾸어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국무회의의 심의권’이라는 모호한 헌법 규정상의 공백이 제헌헌법에는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1919년 임시정부와 1948년 제헌헌법은 군주제를 넘어 공화정체로 이행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정이 서구 시민혁명을 거친 공화정체와 다른 점은 식민지배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군주제가 공화정체로 이행하였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헌법과 정부수립 이후의 헌법이라는 두 개의 헌법이 존재하게 된 점이다. 그러나 두 헌법에서 공통된 제도적 정신은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한을 분점해서 국가를 운영하라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이 헌법 정신을 무시하고 통할과 심의라는 모호한 헌법 규정을 악용하여 대통령에게 권한이 독점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로 국정을 왜곡했다.
87년 민주화 이후에 이를 원래의 헌법정신으로 되돌릴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전환한 것으로 민주화 운동의 성과는 일단락됐다. 이 헌정체제에 의해 선출된 5년 단임제 정부들은 다른 헌법규정이 군부독재 시기의 헌정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됐다. 대통령 권한에 대한 견제가 약한 것은 비선조직이나 친인척에 의한 파행적 국정 실패를 불러 왔다.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의 높은 지지율과 정권 반환점을 전후한 급격한 지지율 하락 그리고 정권 말기의 식물상태에 이르는 국정운영이 반복되고 있다.
이 민주공화국은 100년 전 공화정체를 선언한 이후 지금까지 시민과 호흡하지 못하고 백년의 고독 속에 있다. 조국에서 추방된 망명객 단테가 겪은 피렌체 공화정의 100년 고독을 피렌체 시민들이 마감해 주었듯, 매주 토요일 시민대집회가 이 나라 공화정체의 백년 고독에 종지부를 찍어 주길 기대한다. 100년 전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민족지사들의 고독한 결단이 헌법 정신에 용해되어 있지만 그 고독이 해방 이후 70년 동안 민주공화국의 꿈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백년 고독이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이전에 시민대집회의 힘으로 또 다른 차원으로 진일보하길 고대한다. 그래야 지금의 청년들이 다른 백년, 다른 천년을 설계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