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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바보야, ‘민생’이 곧 ‘정치’라는 거야! /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12 9월 [IF Media] 바보야, ‘민생’이 곧 ‘정치’라는 거야! /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홍일표의 시민/풍/파] <듣도 보도 못한 정치>와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출처: 프레시안

‘민생(民生)’이라는 말처럼 절실하면서도 모호한 말이 없다. 말 그대로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기에 거기에는 온갖 기구하고 억울한 사람들과 정말 악랄하고 치졸한 인간들이 뒤섞여 있다. 남 일인 줄 알았더니 내 일이고,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남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민생 운동’과 ‘민생 정치’에서 다반사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민생’이고, 세상의 모든 곳이 ‘민생 현장’인 셈이다. 예컨대 지금 성주군민에게는 ‘사드 반대’야 말로 가장 절실한 민생 문제이다. 상가임대차 보호, 도박장 반대, 통신 요금 인하, 이자 제한, 대형 마트 입점 반대 모두 ‘민생’ 이슈다.

하지만 ‘민생’은 기득권 세력, 권력자의 언어이기도 하다. “민생을 외면한 정쟁을 중단하고 민생 우선의 정치를 시작하자”는 것은 대통령과 여당, 보수 언론의 단골 레퍼토리다. 세월호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필사의 노력도, 부도덕하고 부적격한 장관 후보자의 임명 반대도,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주장도 그들에겐 모두 ‘민생 외면’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안정된 ‘국민의 삶’, 즉 ‘민생 안전’이다. 권력자의 언어는 어느새 우리 주변에서도 횡행한다. 야당과 시민 단체, 하물며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서조차 ‘민생’ 운운하며 비난하기 일쑤다.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 가짜 민생 vs 진짜 민생>(북콤마 펴냄, 2016년)은 ‘민생’의 절실함과 모호함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을 던진다. ‘민생’ 시민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가 기획했고, 김동춘, 김찬호, 정태인, 조국, 손아람을 인터뷰했다. 참여연대 간사들과 시민 활동가들은 묻고, 또 물었다. ‘진짜 민생’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 인터뷰에 응한 다섯 명의 ‘참여형 지식인’들 또한 뜻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민생’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공유하려 애썼다. 민생 현장에서, 민생 운동 한복판에서 실천을 오래 반복한 이들이 아니라면 묻지도, 답하지도 못할 내용이 책 한권에 가득 하다.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는 ‘민생’의 모호함을 정치적 프레임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치에서 수구 기득권 세력은 민생과 정치의 관계를 항상 대립적인 모습으로 파악했다. 정치라는 것은 민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심지어 민생에 해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프레임이다”고 했다. “시민들이 정치 참여를 경원시하게 되면 수구 기득권 세력이 정치영역을 독점하게 된다. 정치 영역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권의 프레임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다.”라고 규정했다. ‘민생’은 ‘경제’임과 동시에 ‘정치’이고, 또한 ‘현실의 운동’임과 동시에 ‘현실의 정치’라는 설명이다.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질문으로 답했다. 그는 참여연대 민생 운동이 “과연 당사자 조직화 측면에서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궁금하다”고 되물었다. 참여연대의 ‘코디네이터’ 활동을 응원하면서도 김 교수는 “처음에는 우연하게 권리 투쟁에 가담한 이들까지 궁극적으로 하나로 뭉쳐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게 해야 한다. 다음에는 투쟁을 요구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일종의 자조(自助)조직을 꾸려 나가 스스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참여연대가 감정적 연대나 대변에서 더 나아가 흩어지는 시민들에게 다음 운동을 위한 조직화를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군가가 계속 대신할 수 없는 성격의 운동이자 정치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들의 분석과 제안에 이견(異見)을 제시할 이유가 없다. “입에 풀칠도 못하는 이들”은 제대로 조직화될 때에만 비로소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고할 정도로 목소리를 키울 수 있다. 혼자서는 결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how)’?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가 더 열심히 하고, 당사자 스스로 더 각성하고, 지식인들은 더 제대로 된 담론 투쟁에 나서고, 정치인과 정당이 더 적극적으로 응답하면 될 것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책을 읽는 동안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다면 그것일 테다. 몰라서 않았던 것도, 덜 했던 것도 아닌데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의 정치’, ‘정치의 현실’에 대한 돌파구 말이다.

딱 일주일 늦게 출간된 <듣도 보도 못한 정치 :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유쾌한 실험>(문학동네 펴냄, 2016년)을 같이 읽을 수 있다는 건 그래서 행운이다. 이 책만큼 ‘어떻게 정치를 바꿀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정답이란 건 아니다). 대표 필자인 이진순 와글(WAGL) 대표 역시 “에잇, 더러운 정치, 너희끼리 실컷 해먹어라! 이렇게 욕하고 돌아섭니다. 무관심과 냉소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독점할 수 있는 빌미가 됩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 대표는 “소수 직업 정치인이 군림하는 대의제의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입법, 행정, 사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일입니다.”라고 제안한다. 여기까진 같다.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사례’들이다. ‘어떻게’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라고 보여 준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의 우리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현실의 정치’를 변화시키며 나아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험해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사례들이다. 실제로 본인 스스로 주택 담보 대출의 피해자였던 아다 콜라우가 스페인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의 시장이 된 것은 ‘바르셀로나 엔 코무’와 ‘풀뿌리 시민네트워크 PAH 운동’때문이었다. 이는 2011년 5월 스페인 정부의 긴축 정책을 반대하면 광장을 뒤덮었던 스페인 15M운동의 열기가 ‘어떻게’ 정치로 전환될 수 있었나라는 물음에 답하는 사례인 셈이다.

이름 정도는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이탈리아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 ‘아이슬란드의 해적당’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뒤를 잇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들은 다시 ‘어떻게’ 그런 활동이 가능했는가에 대해 혁신적 기술과 연계된 정치 플랫폼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의사결정 플랫폼 루미오, ‘정치 특화 SNS’ 브리게이드, 원스톱 참여행정을 가능케 한 디사이드 마드리드, 최근 대만(타이완) 디지털 부문 총괄무임소장관으로 임명된 오드리 탕이 속했던 시민 개발자 커뮤니티 거브제로, 시민입법발의를 가능케 한 핀란드의 오픈 미니스트리 등이 그것이다. ‘현실의 정치’를 실제로 바꾼, 최근의 사례들에 독자들은 빠져들게 된다.

사실 와글(WAGL)이라는 단체 자체가 어쩌면 ‘듣도 보도 못하던’ 존재, 말 그대로 국내 최초의 스타트업이다. 그래서 한국의 ‘현실’을 잘 모르면서 외국의 ‘사례’만 논하는 것이 마뜩찮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대답 가운데 ‘비현실적’이라 여겨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마 그것은 질문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기술 혁신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논할 단계가 아니며, 이와 유사한 시도들이 과거에 없지 않았다. 최근 국내에서도 빠띠(parti.xyz) 등이 주도가 되어 프로그램 개발자와 운동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새로운 정치’의 실험들이 다양히 이뤄지고 있다. 그저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가 아닌 것이다.

흥미롭게도 두 책 모두 ‘신뢰와 연대’로 마무리된다. 참여연대 김남근 변호사는 “1980, 90년대에는 큰 틀에서 조직간 신뢰가 높았기 때문에 연대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세대 간, 대중 조직의 지도부와 시민 운동가들 사이의 신뢰 쌓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 에버딘 대학교 플레셔 포미나야 교수도 “기술은 불평등과 권력 독점의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는 ‘알파고’가 아니며, 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 사이의 면대면 접촉에 기반 한 신뢰와 연대”라고 말했다.

과연 ‘새로운 정치’로 ‘어려운 문제’의 해결이 가능할까?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뢰와 연대’로 시작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익숙한 가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