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7월 [IF Media]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⑪’작은 형제들(Chiquitanos)’과 공유가치성장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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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⑪’작은 형제들(Chiquitanos)’과 공유가치성장
출처 : 뉴스토마토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동시에 세계 어느 곳도 부럽지 않은 3개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3개의 영혼이란 20세기 청년들의 로망이 된 체 게바라, 300년 전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보편적 사랑의 이상을 품고 과라니족과 치키타노족 속으로 들어간 예수회 신부들, 티티카카 호수 가운데 태양의 섬에서 태어난 잉카문명이다.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의 정신적 가치를 품고 있는 나라는 찾기는 쉽지 않다.
놀라운 점은 이것들이 민족주의나 특정한 지역만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보편주의와 세계주의의 이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는 개별 국가의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인류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볼리비아는 가난하고 라틴 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위치해 사방이 가로막힌 내륙국이지만 그 정신은 세계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체 게바라와 예수회 모두 보편적인 정신을 갖고 볼리비아로 찾아 들었다. 잉카는 볼리비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문명이라는 시원적 질문을 인류에게 던지고 있다.
일국주의를 넘어 세계혁명을 꿈꾼 체게바라
체 게바라는 청년들에게 21세기의 영원한 자유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간 수많은 혁명가와 영웅들이 있었지만 체 게바라는 어떻게 청년들의 가슴을 울리는 자유의 로망을 꿈꾸게 했을까. 다국적 기업 스타벅스에서는 체 게바라를 마케팅에 활용한 상품을 출시했고, 젊은이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체 게바라를 추억하고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체 게바라는 다국적 기업이라는 자본과 일국주의를 넘어서는 세계혁명을 꿈꾸었다.
볼리비아 바예그란데 지역 이게라 마을에 있는 체 게바라의 흉상. 이곳은 세계의 청년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여행하면서 우유니 소금사막만큼이나 찾고 싶어 하는, 체 게바라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그의 삶과 정신이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특정한 나라에 한정되지 않은 세계주의의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였다. 지금의 청년들은 휴학을 해서라도 세계 일주를 해보려고 하지만, 그는 그와 같은 로망을 가장 선명하게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공부보다는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했고, 라틴 아메리카를 오토바이로 종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0살의 이 청년은 남미의 끝인 칠레에서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를 지나 멕시코까지 가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당시 갓 23살의 청년이었던 체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라틴아메리카를 오토바이로 종주한다. 이때 방랑여행은 나중에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지금 볼리비아 이게라에 있는 체 게바라의 기념관에는 당시 종주를 영화로 만들 때 배우가 입었던 옷도 전시되어 있다.
이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곳이 바로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ci)였다. 체 게바라는 해발 4000m가 넘는 포토시 광산 노동자들이 겪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삶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1548년에 포토시 은광이 개발된 후 노동자들은 400년간 수탈당하고 있었다. 포토시에는 은광 개발을 위한 지하 갱도가 여기저기 뚫려 있고, 노동자들은 1000m 아래까지 내려가서 작업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부터 노동자들은 힘겨운 노동을 견디기 위해 코카잎을 가성소다와 함께 씹고 있었다. 코카잎이 주는 각성효과로 중노동을 견딘 노동자들에게 거의 유일한 낙은 금요일 저녁에 값싼 증류주를 한잔 마시고 ‘보라쵸(borracho)’가 되는 것이다. 보라쵸는 우리나라 말로는 ‘취하다’는 뜻이다. 체 게바라는 포토시 노동자들을 만난 후 그들이 겪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21세기 청년들의 로망으로 남은 체 게바라
그러나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을 거쳐 다시 볼리비아로 돌아올 때 포토시가 아닌 볼리비아 동부의 산타 크루즈를 택했다. 볼리비아는 서부(Occidental)와 동부(Oriental)가 확연히 다른 곳이다. 포토시를 포함해 서부 6개주는 안데스의 산악지대로 광업으로 발달한 반면 동부는 대부분 아르헨티나 팜파스가 연장된 대평원 농업지대다. 서부가 광산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됐다면 동부는 대평원에 농장주의 건물이 띄엄띄엄 있다.
체 게바라가 청년에서 혁명가로 성장해 볼리비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감시받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는 쿠바혁명 이후 북한을 방문해 사진을 남길 만큼 국제적 명사가 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들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포토시가 아니라 인적도 드물어 찾기도 힘든 산타크루즈로 간 것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제 사회주의자들은 모택동의 혁명 노선에 따라 농촌처럼 산업화가 덜 진행된 곳에 가서 농촌 게릴라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결국 산타 크루즈 산야에서 정부군에게 쫓기다가 초라한 최후를 맞게 됐다.
체 게바라는 민중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정답은 그에 대한 존칭에 들어 있다. 인디오들은 농장주나 부자에는 에스파냐 말로 ‘세뇨르(Señor)’라는 존칭을 쓰고, 귀족에게는 이름 앞에 ‘돈(Don)’이란 존칭을 붙였다. 그런데 체 게바라는 그냥 ‘체(Che)’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불렸다. 체는 동양의 ‘기(氣)’라는 말이 아랍을 거쳐 에스파냐에 들어가 변형된 말이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에게 동양의 신비로운 힘을 가진 존재처럼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친근한 존재, 자신들을 지켜 줄 것 같은 존재로 가슴 속에 남아 있다.
티티카카 호수에서 ‘태양의 섬’으로 가는 배. 태양의 섬에서 보는 일출은 21세기 새로운 문명에 대한 담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인류 보편의 화해와 협력을 꿈꾼 예수회 정착촌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세계혁명을 꿈꿨다면 보편적 사랑의 영성을 볼리비아인들에게 전해 준 것은 예수회 신부들이었다. 예수회는 기존 가톨릭 선교와는 다른 뚜렷한 특성이 있었다. 1492년 지리상의 발견 이후 에스파냐에서 파견된 가톨릭 사제들은 군인과 마찬가지로 선교를 ‘영혼의 정복’이라고 여겼다. 에스파냐는 1492년 이전까지 700년간 이슬람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전쟁을 국토를 되찾는다는 의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칭했다. 에스파냐는 예수가 태어난 서기 1세기부터 700년간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그 이후 700년은 이슬람 식민지였다. 그래서 에스파냐 사람들은 종교와 인종이 다른 이슬람에 격렬히 저항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은 원래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순례길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민족해방 투쟁이라는 정치적 여정이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다.
에스파냐가 이슬람의 식민지였을 때 영토의 대부분은 이슬람 통치 아래 떨어졌지만, 북쪽의 일부 산악지역은 이슬람 권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곳은 유럽에서도 성질이 드세기로 소문난 바스크족이 살았다. 이들은 민족해방 투쟁의 의미를 종교적 신앙심으로 발전시켰고, 전쟁은 민족의 갈등을 넘어 이슬람과 가톨릭의 신앙전쟁으로 승화됐다. 그들은 ‘산티아고 가는 길’을 종교적 신앙과 국권 회복의 염원을 담은 숭고한 순례길로 만들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 이 길은 정치적인 의미는 삭제되고 순수하게 종교적 순례의 의미로만 여겨진다. 반면 에스파냐에서는 이 길 역시 또 하나의 ‘레콩키스타’였다.
전쟁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는다. 1492년은 지리상의 발견을 한 해이기도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는 국토를 모두 회복한 독립의 원년으로도 기억된다. 그러나 700년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역사를 거친 탓에 독립 이후 에스파냐에서는 이교도에 대한 탄압은 극심했다. 이곳에서는 이슬람은 물론 유대교마저 탄압을 받았다.
영혼의 정복이 아닌 공존의 예수회 적응지주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는 선교마저 폭력적인 정복의 성격을 띠었고, 원주민들의 신전과 종교는 잔인하게 파괴됐다. 반면 예수회는 적응지주의를 채택, 현지를 이해하려고 했다. 바스크 출신의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가 설립한 예수회는 지금도 ‘영신수련’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신부를 양성한다. 수련은 개별 면담으로 진행되는데, 면담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회가 전체의 단일성만큼 개별적 특성이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해서다. 예수회는 선교에서도 현지의 문화나 환경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수회는 인디오들을 이해하고 그들에 동화되려고 했다. 선교 대상은 주로 과라니족이었다. 이들은 주로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브라질,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에서 광범위하게 살았다. 예수회는 과라니족이 사는 곳에 예수회 정착촌을 만들었다. 처음 만들어진 곳은 파라과이 정착촌이었다. 그 다음에 세워진 브라질 국경지대의 정착촌은 영화 ‘미션’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는 과라니족이 아닌 치키타노족이 사는 곳에 정착촌이 만들어졌다. 이곳이 바로 볼리비아의 콘셉시옹(Concepcion)을 비롯한 치키타노스 예수회 정착촌이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과라니족 마을인 우루비차(Urubicha). 지금도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 과라니족 마을이다. 300년 전의 예수회 신부들처럼 보편 인류를 지향하면서 세계정부의 이상을 품게 하는 영성이 가득한 곳이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다른 정착촌들은 에스파냐 식민당국과 인디오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해체됐고, 지금은 치키타노족의 컨셉시옹 정착촌만 남았다. 예수회 신부들은 바로크 음악을 인디오들에게 전수하려고 바이올린 등 악기를 만들었는데, 과라니족에게 제작을 맡겼다.
공존의 21세기 문명을 상상하게 하는 잉카의 태양섬
매년 여름 콘셉시옹에서는 바로크 국제음악제가 열린다. 이 음악들은 유럽에서는 진작에 사라진 바로크 양식으로, 300년 전 예수회 신부들이 전한 그대로 전수돼 오늘까지 볼리비아 여름밤을 수놓는다. 볼리비아에 남아 있는 예수회의 세계문화유산이 전하는 것은 세계주의와 보편주의를 지향했던 그들의 정신이다. 에스파냐 식민당국이 은광 수탈에만 몰두할 때 신부들은 인디오와 공존할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이런 이유로 예수회는 식민당국과 교황청에서 해산 명령까지 받지만, 그들의 정신은 면면히 남았다. 지금 컨셉시옹 지역의 신부들은 독일과 폴란드에서 온 프란시스코 수도회 신부들이다. 이 볼리비아 시골에는 대구교구 출신인 한국 신부도 한 분이 있다. 독일 뮌헨 성당의 지원을 받는 컨셉시옹 성당에는 부설로 된 직업훈련원이 있는데, 농촌 청년들에게 도시에서 취업 가능한 기술들을 가르친다. 주변 농촌에서는 커피 재배 등의 기술을 전수하고 그 생산물을 공정무역의 형태로 독일에 가져간다. 이들 신부와 독일 자원봉사조직이 하는 일이 바로 공유가치 성장(Shared Value Growth)의 소중한 실험들이다. 경제적 이익과 효율만 따진다면 애초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러나 경제적·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고려하는 공유가치 성장의 시각으로 보면 인디오와 해외 자본이 상생할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컨셉시옹 성당 부설인 직업훈련소. 독일인 신부와 폴란드 주교, 멕시코 과달루페 수도회 수녀 그리고 한국 수녀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인류의 보편적 사랑과 공존을 실천하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볼리비아는 잉카문명을 품고 있다. 티티카카 호수 한가운데 있는 ‘태양의 섬’은 태양신을 숭배한 잉카의 이상을 여전히 머금고 있다. 태양의 섬에서 맞는 아침 해는 21세기 새로운 문명에 대한 담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400년 전 지리상의 발견 이후 인류는 서구문명과 잉카문명이 충돌한 폭력적 세계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21세기는 태양의 섬에서 일출을 보면서 피와 수탈의 역사를 넘어서는 공존의 세계문명을 상상해 볼 수 있다. 400년 동안 볼리비아에서 있었던 글로벌 불평등을 넘어 보편적 인류로서 공존하는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로 방식은 달랐지만 체 게바라의 세계혁명처럼, 그리고 예수회의 인류 보편을 지향했던 적응지주의처럼 말이다.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