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9월 [IF Media] 북한 수해와 인도주의 / 김연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세상 읽기]?북한 수해와 인도주의
출처: 한겨레
함경북도의 홍수 피해가 심상치 않다. 유엔기구는 50~60년 만에 최악의 수해라고 평가했다.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인도적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코리아’에서는 ‘침묵’만이 흐른다. 북한 정권의 문제를 지적하는 보도는 넘쳐나지만, 인도주의의 목소리는 없다. 핵실험을 한 북한 정부가 미울 것이다. 그러나 ‘인도주의’는 한 사회의 품격을 반영한다. 이러면 안 된다.
인도주의를 상징하는 말이 있다.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 1984년 10월 레이건 대통령의 말이다. 그때까지 미국은 ‘배고픈 아이는 독재정치의 산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독재국가인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식량지원을 늦추어 더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면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식량은 정치의 도구였다. 물론 에티오피아의 독재정권 역시 반정부 세력을 학살하기 위한 기회라고 판단했다.
레이건의 생각을 바꾼 것은 제재의 역설이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식량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굶어 죽는 것은 민중들이다. 1984년 9월 미국 방송들은 에티오피아의 아사 현장을 보도했다. 침묵을 지키던 정치권과 시민단체들도 나섰다. 레이건 정부는 식량을 원조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주민과 정권을 분리하자는 말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레이건 정부가 에티오피아에 식량지원을 할 때, 하역비용으로 톤당 12달러를 독재정부에 주었다. 그 돈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원조를 하려면 해당 정부의 행정기구를 이용해야 한다. 독재와 부패를 이유로 인도적 지원을 반대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정상국가에서 재해는 인도적 위기로 이어지지 않기에 도울 일도 없다. 인도적 지원의 대상이 대체로 문제국가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1984년은 한반도의 인도주의 역사에서도 기억할 만하다. 그해 9월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수해물자를 받았다. 인도적 지원은 북한이 먼저 했다. 분배의 투명성을 먼저 주장한 쪽도 북한이고 거부한 쪽은 남한이다. 왜 전두환 정부는 상투적인 북한의 제안을 은근슬쩍 받았을까? 1년 전인 1983년 아웅산에서 자기를 암살하려던 북한이 아닌가? 전두환 정부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인도주의를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활용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 레이건의 인도주의와 전두환의 실용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인도적 지원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다. 그걸 한다고 바뀔 정세도 아니다. 다만 민간의 인도적 지원을 허용해 주었으면 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결의안이나 정부의 어떤 제재에도 인도적 지원은 예외다. 통일부는 분명하게 북한 인권 개념에 인도주의를 포함한다고 했다. 입만 열면 인권이요, 예산을 중복으로 쓰는 수많은 북한인권기구들이 존재가치를 증명할 때가 왔다. 인도적 지원을 부정하는 인권은 성립하기 어렵다. 북한인권 담론의 실체를 드러낼 중요한 순간이다. 1984년보다 세상은 각박해졌고 정부의 품격은 타락했다. 야당과 시민단체도 정치공학에 사로잡혀 ‘인도주의’에 침묵한다. 침묵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핵문제와 수해는 다른 차원이고, 인도주의는 ‘야만의 전쟁’ 중에도 작동하는 ‘문명의 증거’다. 우리도 어려운데 도울 형편이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콩 한쪽이라도 나누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동포에 대한 예의’에 앞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있다. 북한의 수해가 묻는다. 당신은 야만과 문명, 어디쯤에 서 있느냐고.
김연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