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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세상읽기]그들의 꿈을 짓밟지 마세요 /이동연(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01 3월 [IF Media] [세상읽기]그들의 꿈을 짓밟지 마세요 /이동연(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세상읽기]그들의 꿈을 짓밟지 마세요

출처 : 경향신문, 사진출처: BBC

“다른 예술 분야의 유명인들이 국악을 활용해 많은 작품을 만드는 것을 돕고 싶다”던 한 유명 드러머는 자신의 연주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한 젊은 여성 국악인을 불러놓고 음탕하게 협업할 요량으로 옷을 벗으라고, 가슴을 보여달라고 한다. 연기를 가르쳐주겠다던 한 유명 배우는 한 여성 연기 지망생을 모텔로 데리고 가 어느 저질 드라마의 대사처럼 “더운데 씻자”고 한다.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보여주겠다던 한 노 시인은 술집 의자에 누워 바지를 벗고 자신의 아랫도리를 주무르며 옆에 있는 어린 여성 문인들에게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라고 한다. 학점을 주겠다며,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진정한 연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며, 음흉한 미끼를 던지는 상층부 남성 문화예술계 권력자들은 국악을, 연극을, 시를 그렇게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데 사용했다. 그 선생을 존경해서 그 학교 그 과에 입학했다고 고백한 어느 여학생에게 돌아온 것은 차마 말할 수조차 없었던 치떨리는 선생의 희롱과 음욕이었다.

그것도 한때의 낭만이라고, 창작을 위한 상스러움이라고 말하던 시대는 끝났다. 가해자 행동이 ‘낭만이자 자유’라고 말하던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처벌을 받아야 하고, 예술계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자리에 있었던 너와 나, 상습적인 성희롱을, 분위기 살리는 음담패설로 관대하게 웃어넘기려 했던 우리들, 그 민망한 상황을 차라리 회피하고 싶어 했던 동료들, 그 아픈 기억의 고백을 손쉽게 위로하려 했던 누군가들. 우리 모두 이 사태의 우울함과 엄중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모두 상상의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 뼈저리게 통감해야 한다. 피해자는 우리의 동료이고, 동지이며, 미래의 벗이기 때문이다.

젠더폭력은 계급폭력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폭력보다도 근원적이고 원초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정치적 당파의 유불리를 가늠하는 방어적 센서가 아니다. 김어준의 ‘웃긴 변명’대로 작금의 ‘미투(#MeToo) 운동’이 설령 보수진영의 공작으로 이용된다한들, 그 운동이 공작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미투 운동’ 그 자체이다. 김어준의 발언이야말로 젠더폭력을 정치적 이해관계로 환원하려는 정치적 음모이며, 그가 그동안 세상을 공치사하며, 살아온 정치적 음모론의 졸렬한 연장이자, 성폭력 피해자의 자기 고백에 대한 마초들의 인습적인 아전인수에 불과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망언이다. 이 와중에 보수진영의 공작을 운운하는, 그런 나라 걱정을 하는 진보라면 차라리 분쇄되는 게 낫다. 정치적 진보로 젠더폭력의 현실을 정당화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정당화의 역사가 상층부 진보적 남성 문화예술 권력의 민낯을 은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수요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2018학년도 입학식이 있었다. <숲속으로>라는 유명한 뮤지컬 영화의 동명 제목으로 시작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새내기들의 힘찬 출발의 예식은 동명 뮤지컬의 주제곡을 개사해서 연기과 학생들이 멋지게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예술의 숲속으로 들어가는 새내기들, 그들에게 예술의 숲은 무엇일까? 그 숲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예술의 원대한 꿈을 품고 시작하는 그들에게 숲은 포근하고, 아늑하며, 상쾌한 산소를 뿜어내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어야 할 텐데. 그런데 그 숲이 예술 새내기들에게 공포의 밀실이자, 어둠의 속이 된다면, 숲은 그들을 집어삼키는 포식자의 소굴이다. 예술의 숲속으로 이제 막 들어가는 그들에게, 이미 그 숲속에서 들어갔다 길을 잃고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숲이 진정 그들의 안식처가 되려면 숲은 생태적 윤리의 미학을 위해 스스로 이렇게 명령해야 한다. “그들의 꿈을 더 이상 짓밟지 마세요.”

이동연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