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7월 [IF Media] [시론]교활함을 용서하지 않을 방도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시론]교활함을 용서하지 않을 방도
출처 : 경향신문
유독 일자리 안정, 탈원전, 최저임금 상승과 같은 사회경제 의제와 정책을 둘러싸고 ‘제국의 역습’이 진행 중이다. 이를 목도하며 삶다운 삶과 정치다운 정치, 그리고 그것을 구현할 현명함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삶다운 삶은 교활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 삶의 터전을 만들어내는 정치다운 정치도 마찬가지다. 삶다운 삶과 정치다운 정치 모두 ‘과감함’을 미덕으로 삼는다. 즉, 지금의 주어진 정치사회적 질서를 넘어서는 초월의 결단을 행한다.
꿈을 꾸기 때문이다. 삶다운 삶과 정치다운 정치가 과감함을 미덕으로 삼아 초월의 결단을 행하는 이유는. 하지만 교활함이 꿈의 구현을 가로막고 사멸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끊임없이 이간질한다.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구분해 차별하는 것, 생명과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원전 찬성과 반대로 시민과 주민을 갈라놓는 것, 영세상공인과 노동자 사이를 ‘최저임금 폭탄론’으로 겁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간질이고 교활함이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자들이 그리한다. 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영속하기 위해서. 이 때문에 꿈꾸는 자의 삶과 정치는 교활함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꿈을 꾸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소망하기에 그러하다. 지금의 주어진 질서로는 가능치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행복한 삶은커녕 생존마저 어렵게 하는 것.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부분적으로나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다른 삶과 정치에 대한 꿈을 찾아내고 이룩한 가치이다. 행복한 삶과 생존을 위해서는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코 가능하고 편한 것만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의 꿈 혹은 꿈꾸는 사람들을 불편해하는 자들만이 인간의 본성을 가능함과 편함에 가둔다. 가능하고 편한 것들은 너무나 자주 순응과 굴종을 요구한다. 사람들을 자기의 의지에 따라 숨 쉴 수 없는 불행과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
꿈의 구현은 불가능하지 않다. 자본주의 경제혁명과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거친 근대 인류문명의 역사가 입증해주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통해서도 목도한 바다. 탈빈곤과 반독재 민주주의의 꿈을 약 40년 만에 이루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의 체험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탈원전의 꿈을, 영국 토트너스 마을에서는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을 강요하는 거대독점자본 지배의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율공동체의 꿈을, 독일과 프랑스와 스위스를 비롯한 EU의 여러 국가에서는 과도한 임금격차 해소의 꿈을 구현해 가고 있다.
꿈을 실현하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이 있다. 교활함에 속지 않는 현명함이다. 용서할 수 없다며 물리력을 동원해 처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는 교활함을 제어할 수 없다. 오히려 교활함에 넘어가 실족한다. 교활한 자들은 이간질을 정당화하기 위해 삶을 기만하고 정치를 왜곡하는 지식과 담론으로 무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것은 허구 혹은 허위인 것만도 아니다. 그들의 지식과 담론은 ‘사실의 요소’를 담지하고 있다. 프로 사기꾼은 “99%의 진실과 1%의 거짓을 통해 사람들을 속이고 이익을 취한다”는 말이 있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이들의 교활함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속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들의 사실 혹은 진실은 오로지 이미 주어진 정치사회적 질서, 즉 기득권층 주도의 질서를 전제할 때에만 사실 혹은 진실이다. 따라서 속지 않으려면 지금의 질서가 아닌, 꿈꾸고 있는 이후의 새로운 질서에 준해 사실 혹은 진실 여부를 판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현명함은 지평의 너머에서 나오는 것이다.
저명한 정치경제학자로서 프린스턴 대학의 석좌교수였던 앨버트 O 허시먼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저서를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한 자들이 어떤 논리에 기대어 교활함을 행사하며 꿈꾸는 자들을 가로막는지 일러주었다. 첫째,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는 역효과 테제이다. 둘째,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무용 테제이다. 셋째,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라는 위험 테제이다. 일자리 안정과 탈원전과 임금격차 해소를 두고 가해지는 기득권층의 지식과 담론도 이러한 테제들에 기초해 있음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그들의 교활함에 속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교활함을 용서하지 않을 방도이다.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