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IF Media] [시론]‘관료의 함정’ 빠진 규제 샌드박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소장)

17 10월 [IF Media] [시론]‘관료의 함정’ 빠진 규제 샌드박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소장)

 [시론]‘관료의 함정’ 빠진 규제 샌드박스

출처 : 경향일보

최근 4차 산업혁명, 혁신성장이 새 정부의 경제정책 의제로 부상하면서 이를 위한 규제개혁론이 주목받고 있다. 국무조정실이 주도한 새 정부 규제개혁의 핵심은 이른바 ‘규제 샌드박스’ 제도 도입이다.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 규제를 면제, 유예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특정 지역’을 ‘특정 산업이나 기술, 제품, 서비스’로 대체했을 뿐, 특정 대상에 대해 사전규제의 예외를 두겠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되었던 ‘규제프리존법’과 동일한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박근혜 정부하에서 민주당이 반대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비판했던 ‘규제프리존법’과 동일한 구조인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새 정부의 규제개혁론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대통령의 네거티브 방식 규제 전환 공약을 기존 관료들이 기존 사고로 변질시킨 이른바 ‘관료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한국의 규제시스템은 강한 사전규제-약한 사후규제 구조이다. 이에 비해 미국은 약한 사전규제-강한 사후규제를 특징으로 한다. 인허가 조건을 엄격하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전규제라면, 징벌적 손해배상, 집단소송과 같이 피해가 발생할 경우 기업에 사후 손해배상 책임을 강하게 묻는 것이 대표적인 사후규제책이다. 사전규제는 행정 관료의 권한이 강하게 작용하는 반면, 사후규제는 사법절차에 의한 제재가 주된 것이다. 사전규제는 관료의 권한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쟁자(기업, 기술, 상품)의 시장 진입을 어렵게 해서 시장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는 효과를 낳는다. 그런 점에서 강한 사전규제제도는 과거 경제성장기에 관료와 기존 시장 기득권 간의 담합의 산물이기도 하다. 강한 사전규제제도하에서 재벌은 정경유착을 통해 예외를 인정받아 특혜를 누려왔고, 정치권력과 관료는 그 대가로 검은 뒷돈을 챙겨왔다.

4차 산업혁명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규제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빅데이터와 이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이고, 빅데이터의 축적에는 개인정보의 활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개인정보의 활용은 개인정보보호라는 공익적 법익과 상충될 수밖에 없다. 해법은 무엇일까.

관료적 발상은 규제를 완화하거나 규제의 예외를 두었다가 문제가 되면 사후에 ‘사전’규제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가 바로 이런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이미 해온 방식이다.

2009년 신용정보법 전면개정을 통해 신용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사전규제를 대폭 완화했다가 연이은 신용정보 유출사고에 이어 2014년 1월 카드사들에서 무려 1억건이 넘는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하자 다시 강한 사전규제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사전규제 중심의 규제 패러다임을 그대로 두고 사전규제를 완화하거나 그 적용을 유예하고 면제해주는 방식으로는 과거의 사례를 반복할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은 사전규제 중심에서 사후규제 중심으로 규제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1억건의 개인정보 유출사건만 해도 그 과정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해당 카드사들은 고객 원데이터의 제공, USB 작업 허용 등 외부 용역직원이 손쉽게 고객정보를 가져갈 수 있도록 업무를 처리했다. 미국이라면 기업의 생존이 어려울 수준의 천문학적 손해배상을 해야 했을 것이고, 따라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엄격히 업무를 처리했을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는 비식별 정보의 활용 역시 폐지 수준으로 사전규제를 대폭 축소하되, 식별화 방지를 기술적으로 의무화하고, 식별화해서 유출될 경우 기업이 망할 수 있는 수준의 사후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한다면 기업이 스스로 예방조치를 해서 그 어떤 사전규제제도보다 강하게 작동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 사전규제 없는 외국 사례를 들며 규제 개혁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 같은 사후규제 강화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반대한다. 한마디로 사전규제도, 사후규제도 싫다는 것이다.

미국을 창업의 나라라고 한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이 기업에 사후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주는 제도를 발전시키고, 반시장범죄인 분식회계를 한 60대가 넘은 월드컴의 CEO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하고, 회계법인을 파산시킨 미국 사법부의 엄격함이 바로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다.

사전규제에서 사후규제로의 규제 패러다임 전환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새 정부가 변형된 규제프리존법인 ‘규제 샌드박스’ 도입이 아니라 규제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정부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