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8월 [IF Media] [시론] ‘마지노선 민주주의’넘어서기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시론] ‘마지노선 민주주의’넘어서기
출처 : 경향신문
고요하다. 혁명으로까지 불린 ‘촛불’이 언제 타올랐던가 싶다. 가을과 겨울과 봄을 거치면서 수많은 시민으로 꽉 찼던 광장과 거리가 텅 비어 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대통령과 정부를 출범시킨 후의 풍경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허전하다. 모처럼 열린 시민의 정치적 기회 공간인 촛불광장과 거리가 순식간에 ‘역사 유적’이 되어버린 듯하다.
소란스럽다. 광장과 거리의 한 귀퉁이에서 촛불에 손과 몸을 녹이며 연명했던 정치권이 또다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국민의 대표’를 자임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주로 야권이 외교안보와 인사 문제를 갖고 그런다.
태극기를 뒤집어쓰고 사멸의 위기를 넘기고자 했던 자유한국당이야 그렇다 치자.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왜 그럴까? 그들 모두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동의하지 않았던가? 진심으로 동의한 것이었다면 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을 대안 제시의 행보를 해야지, 왜 대통령과 정부 흠집 찾기에만 열심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국민은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이 의미하는 바를 둘러싸고 (친)야권 일각에서 우려를 제기했다. 야권과 의회를 우회해 여론몰이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려는 의도, 즉 포퓰리즘을 구사하려는 포석 아니냐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런 생각은 기우거나 또 다른 흠집 찾기를 위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기대는 낮고, 불신은 높은 객관적 현실을 지적함과 동시에, 시민들이 촛불로 철옹성 같았던 정권을 퇴출시킴으로써 자신의 역능을 확인했기에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주권-정책결정권-행사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의 흠집 찾기로 소란만 떨고 있는 야권을 보면 충분히 그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정말 직접적인 정책결정권 행사를 원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고요함이 깃든 텅 빈 광장과 거리를 볼 때 그러하다. 즉, 대부분의 촛불시민이 자신의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가 믿든, 안 믿든 간에 다시금 기성 정치권에 나라 살림을 맡긴 것을 볼 때 그러하다.
마지노선 민주주의! ‘대통령의 권력 사유화→촛불→대통령 탄핵→새로운 대통령 선출→일상으로의 복귀’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살피다 떠올린 개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쁜 대통령을 유권자의 투표로 심판하기 위해서 촛불을 드는 ‘방어적 성격의 민주주의’라는 생각이다. 주로 대통령 심판의 권리를 양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쟁취 및 수호의 경계로 삼고,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과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은 삶의 현장에서 각자 맞서 싸우거나 적응해야 할 사적인 문제라 여기는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사적인 문제는 공적 공간인 촛불의 광장과 거리에서 다루어서는 안되며, 다룰 수도 없다. 옳음과 그름을 판정하기엔, 또 촛불의 대의로 삼아 내기엔 너무나 내밀하고 복잡하기에 그러하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 목적은 촛불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가 제한적이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원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실현하기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도 아니다.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모색하기 위해 꼭 살펴야 할 것, 즉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적 특성’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문 대통령의 언사는 한국 민주주의 특성의 일면만 본 것이다. 왜 새로운 직접적 결정의 공간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지, 또 어떤 종류의 사안에 대한 직접적 결정이 우선 필요한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직접민주주의를 제약하는 혹은 필요로 하는 다수 보통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먼저 헤아려야 함을 의미한다.
직접민주주의를 포퓰리즘과 등치시켜 대통령 비판의 소재로 삼는 행태는 염치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를 정상화하고 강화하는 논리와 실천을 먼저 선보이는 게 순리이다. 즉, 국민의 진정한 대표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문 대통령과 정부보다도 한발 앞서서 마지노선 저편의 문제, 즉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광장과 거리의 고요함과 정치권의 소란스러움이 교차하는 지금, 각자 모두 다른 방식으로나마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사유와 실천을 벌여야 할 때이다.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