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6월 [IF Media] ‘시민’과 ‘주민’, 대화가 필요하다 / 홍일표(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시민’과 ‘주민’, 대화가 필요하다’]
출처: 프레시안
닮은 듯 다른 두 단체 창립 행사를 가다
#장면 1.
지난 6월 16일 저녁 서울시 종로구 소재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는 (사)다른백년의 창립 행사가 열렸다. 200석은 족히 되는 행사장이었지만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다른백년 연구원’ 원장을 맡은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지난 100년의 뒤틀린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100년을 모색해야 한다”며 단체 설립의 이유를 설명했다.
김동춘 원장의 ‘판을 여는 말’이 끝난 후엔 이래경 이사장과 네 명의 이사들(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주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최상명 우석대 교수)이 향후 활동 방향과 사업 계획 등에 대해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설명했다.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들의 깊은 성찰과 힘 있는 제안은 참석자들의 집중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청중 가운데는 유명 인사도 적지 않았지만, 이름 모를 ‘깨어 있는 시민’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장면 2.
6월 18일 인사동 골목 한쪽 태화빌딩 지하는 토요일 오후였음에도 달리 북적였다. (사)한국주민자치학회가 준비한 ‘주민 자치법 입법 연구 포럼’ 출범식과 세미나에 참석하러 온 이들이 대략 100명은 되었다. 안재헌 전 여성가족부 차관과 이건 서울시립대학교 전 총장이 포럼 대표를 맡았고,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 국민의당 유성엽 의원,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도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청중 가운데는 학자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전국에서 모인 주민자치협의회 대표와 주민자치위원회 위원들이었다. 전상직 한국주민자치학회 회장은 “지역 주민이 관료 행정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아직 없다. 주민 자치법 제정을 위한 종합적·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며 포럼 취지를 설명했다.
달랐다
이틀 간격으로 같은 종로에서 치러진 두 행사의 풍경과 속살은 많이 달랐다. 한쪽은 ‘시민’을 주체로 호명했고, 다른 한쪽은 ‘주민’을 내세웠다. 한쪽은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 지식인들이 중심을 잡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은 중도 또는 보수라 불리는 지식인들의 참여가 많았다. 한쪽은 중앙 정부나 전국적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면, 다른 한쪽은 지방 정부나 지역 이슈에 천착하는 이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한쪽은 제도 정치 바깥에서 힘의 원천을 찾고 변화를 도모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면 다른 한쪽은 국회의 입법 과정으로 진입해 들어가 입법적 성과를 내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한쪽이 ‘사회 변화 담론의 생산과 확산’을 강조한 것과 달리 다른 한쪽은 ‘지역 현장에서 구체적 실천’을 더 중시했다.
닮았다
한국 사회가 지금 직면한 문제는 ‘행정적 개선’이나 ‘단기 처방’ 정도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 대해선 두 행사 공히 공감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으며 변화를 열망하는 주체 스스로의 노력과 성장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 또한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공통점은 단체 창립을 주도한 두 사람의 기업인의 존재다.
다른백년 이래경 이사장은 본래 운동권이었다. 하지만 30여 년 전 기업을 설립했고, 성공적으로 경영했다. 그간에도 ‘일촌공동체’ 등 시민 단체를 설립해 꾸준히 지원해 왔고, 작년 말 퇴직 후엔 ‘사회적 상속’을 스스로 실천했다. 은퇴 후 가처분 자산 20억 원 가량을 일촌공동체와 다른백년 등에 기금으로 내기로 한 것이다.
‘지방 자치법 입법 연구 포럼’의 모태인 한국자치학회를 설립한 전상직 이사장은 현직 기업인이다.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을 5년간 맡아 지원했고, 지난 15년간 주민 자치 현장 곳곳을 누비며 조직을 바닥을 다졌고, 조직을 키웠다. 2006년에 학회를 직접 창립했고, 지금까지 학회 운영 경비와 월간 <주민자치>, 월간 <공공정책> 등의 발간을 책임졌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고,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몰랐다
두 단체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거의 모른다. 위원 명단에 이름을 양쪽 다 올린 건 필자 한명 뿐이다(전상직 회장은 김동춘 교수와 인연으로 다른백년 행사장에 참석하긴 했다). 사실 필자도 주민자치위원들을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동네 주민자치위원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 지는커녕,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조차 잘 모른다.
행정자치부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이미 2818개의 주민자치센터가 읍·면·동 단위에 설치되어 있고, 주민자치위원들은 그를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서울시가 주도하는 마을 공동체 사업이나 과천 등에서 활발한 풀뿌리 시민운동과도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고 새마을운동협의회나 바르게살기협의회 등 관변 단체와 비슷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민자치위원들에게 이른바 ‘시민운동’은 여전히 낯설다. 자신들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운동권’들이 하는 것으로 여긴다.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만나지도 않고, 서로를 잘 모른 채 각자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대화를 나누고 힘을 모으자
청중으로 참석한 한 주민자치위원은 “지금은 정치만 넘치고 자치는 없다”며 “단체장과 지역 토호가 중심이 되는 지방 분권과 주민 자치는 다른 영역”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관료에 의해 행정적으로 통제되는 주민 자치의 진화를 위해 주민 자치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런 점에서 귀 기울일 만하다. 주민 자치를 저해하는 행정 관료 통제를 더 큰 제도적 수단(법률)을 통해 제어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그동안 조례나 시행령 정도에 따라 주로 움직였던 이들에게 법 제정은 그 자체로 큰 도전이다. ‘아래로부터의 입법 운동’ 과정에 풀뿌리 시민운동을 비롯한 다른 사회운동, 각 정당의 정치적 이해 득실이 다양한 영향을 미칠 것임을 고민하는 건 이들에게 아직 먼 얘기다. 김동춘 교수가 “제도 정치 밖의 정치, 정당 밖의 정치를 통해 제도 정치를 압박하려 한다”고 말한 것도 사실 낯설 수밖에 없다.
이래경 이사장은 “파편처럼 흩어진 시민 사회의 동력과 결기와 지혜를 담아내고자 한다”고 주장해 왔다. ‘늘 보는 사람’이 장소만 바꿔 ‘늘 하던 얘기’를 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주민 자치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들기 위해 주민자치위원이나 주민자치회 세력으로도 모자란다. 입법을 위해서는 훨씬 넓은 공감과 연대의 기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만나 얘기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언어와 문법이 달라 처음엔 불편할 수 있다. 손짓발짓이라도 해야 한다. 관료나 정치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와 문법을 익힌 것에 비한다면 훨씬 쉬울 것이다. 이래경 이사장과 전상직 이사장이 직접 만나 얘기 나눠보는 것에서 시작해 볼 수 있다. 김동춘 교수의 주민자치위원 대상 강연, 동네 주민자치센터에서 이뤄지는 다른백년의 시민 교육 프로그램도 짜봄직 하다. 그러면서 ‘시민’과 ‘주민’은 대화를 나누고, 힘을 모으게 되는 것이다.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