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IF Media] 박근혜 리더십? 박근혜 헤드십! /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21 9월 [IF Media] 박근혜 리더십? 박근혜 헤드십! /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박근혜 리더십? 박근혜 헤드십!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박근혜에 던지는 질문으로 찾는 야당의 무능함

출처: 프레시안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사회적 동의와 신뢰에 기반한 권위를 통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통령이라는 지위 권력에 주로 기대는 헤드십에 가깝다. 이념과 조직적 자원, 그리고 목표와 결과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낡은 이념과 계파에 기대어 기득권 체제의 유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중요한 물음은 “왜 그러하냐”라는 물음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는 물음이다. 즉, “어떻게 헤드십에 가까운 리더십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야당 지도자들의 무능에서 찾을 수 있다. 낡은 이념과 계파를 넘어서고, 기득권 체제를 혁파하는 변혁적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지 못한 것은 야당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는 보다 강력한 지위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일 수밖에 없다. (필자)

헤드십에 가까운 리더십 ?

정치리더십은 사회적 동의와 신뢰에 기반한 권위를 통해 작동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대단히 취약하다. 사회적 동의를 구하고 신뢰를 쌓기 위한 경쟁자와 시민사회와의 소통도, 소통을 통한 경쟁자와 시민사회와의 협치도 찾아볼 수 없다. 독선과 독단과 독주 속에 권위를 얻지 못하고 권위주의만 내세운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대통령의 지위 권력에 기댄 헤드십에 가깝다 하겠다.

박근혜 대통령 리더십의 취약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이념과 조직적 자원, 그리고 목표와 결과의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념적 측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구시대적이다. 박정희 체제를 지탱했던 국가중심주의(행정부 중심주의)와 반북·반공주의를 다시금 동원하고 있다. 조직적 자원의 측면에서는 새누리당의 ‘친박계(충성파)’에 한정되어있다. 목표와 결과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위한 변혁이 아닌 기득권 체제의 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을 연상시킨다. 서로 닮은꼴인 것이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은 산업화 초기라는 시기적 특성상 기득권 체제의 유지가 아니라 그것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또 민주화 이전이라는 시기적 특성상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자행되는 노골적인 국가폭력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낡은 이념에 기댄 리더십?
정치리더십은 이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념 그 자체를 추종하고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치에서 이념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념은 사회적 포괄과 통합을 위한 언어이다. 이 언어를 통해 사회적 다수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정의하고, 우선 해결할 과제들의 순위를 설정하며, 취해야 할 행동의 규범과 전략을 도출한다. 따라서 이념은 같은 이름을 가졌다 해도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변할 수밖에 없다. 즉 이념은 시대를 닮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박정희 체제의 대표적인 이념, 국가중심주의와 반북·반공주의는 사실 이념이 아니다. 유신 독재 때조차 그러했다. 배제와 금지와 공포감의 조성을 위한 폭력적 언어일 따름이다. 이런 언어에 기댄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와 생각을 가진 이들 간의 공존을 위한 기술인 정치에서 배제해야 할 것은 오직 배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처럼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그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전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국가중심주의와 반북·반공주의를 다시 불러냈고, 통치의 자원과 기술로 사용하고 있다. 정권 출범 이후 정부조직법 개정을 둘러싼 행정부-국회 간 대치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국회에 대한 공격과 통합진보당의 해산 청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회에 대한 공격과 특정 정당의 해산 청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국회가 사사건건 행정부의 발목만 잡으며 민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면, 특정 정당이 헌정체제와 공화의 질서를 무너뜨릴 ‘현저한’ 위험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공무원 연금 개혁과 관련한 국회법 개정 시도에서 드러났듯이, 국회는 행정부의 의사를 받아들이면서도 권력분립의 관점에 기반해 국회의 위상과 역할을 정상화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국회에서의 여야 대치는 대부분 대통령-청와대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집권여당이지만 기본적으로 국회의 일원으로서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비판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새누리당이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면서 증폭시킨 것이었다.

또한 통합진보당은 공화의 질서를 무너뜨릴 분명한 의사를 갖고 있다는 확증이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로 시도하고 실현시킬 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통합진보당에 대해 다수가(76.1%)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산 청구에 대한 찬성 비율은(54.6%) 상대적으로 낮았다. 국민들은 낙후한 채 소멸해가는 세력을 갖고 굳이 정쟁의 빌미를 제공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와 같은 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핵과 사드배치 문제를 다루면서도 반북·반공주의를 이념적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해법을 내놓으며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적인 비방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상대방을 반이성적인 적으로 몰고 간다. 지난 9월 9일의 북한의 핵 실험을 두고서는 김정은을 거의 정신병자로 지칭하며 한국 사회 ‘내부의 불순분자’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대응을 하고 있다.

계파에만 안주하는 리더십

정치리더십은 전체를 위한 것이어도 늘 부분에 기반해 있다. 처음부터 전체를 획득하는 정치는 없다. 또 전체를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체를 지향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부분의 위상과 역할을 전체의 관점에서 조망해야만 한다. 그래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차지하고, 그 권력을 통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결과를, 최악이 아닌 차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의 경우가 그러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는 부분적인 것의 공공성을 입증해 다수의 지지를 얻어 전체를 대표하고자 하는 실천이다.

부분에 기반해 다수를 획득하고 전체를 지향하는 정치에서 리더십을 구사하는데 불가피한 것이 바로 파벌이다. 추종자 혹은 동조자 조직을 리더십 자원으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벌은 크게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파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계파이다.

정파든 계파든 파벌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파벌이 긍정적이기 위해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전체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해야 한다. 당권이나 대권을 둘러싼 파벌 경쟁이나 갈등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 즉, 당권과 대권은 공익 증진을 위한 정책의 구현 수단이어야 한다. 파벌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 바로 리더십이다. 이 리더십이 잘 작동해야 다수파가 되어 다수당을 만들 수 있고, 다수당이 되어 정권을 창출하고 국가를 대표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이 리더십의 정수에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철저하게 친박계에 기반해 있다. 특히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는 동안 그러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친박계 중에서도 특히 충성파에 기대어 있다. 부정적 의미에서의 충성파다.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지 않고 오로지 순응하면서 호위무사의 역할만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충성파다. 충성파의 대표적인 경우가 새누리당의 이정현 대표이다. 친박계였으나 쓴소리를 했던 이들은 모두 배척당했다. 증세와 국회법 개정 문제를 두고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가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 탈당까지 했다 복당한 유승민 의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전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부분을, 그것도 부분의 핵심만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기득권 체제 유지의 리더십?

정치리더십은 목표와 결과의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변혁적 리더십과 거래적 리더십이다. 변혁적 리더십이란 기득권 체제를 혁신하는 리더십이다. 기존의 이해관계망에서 벗어나 기득권 담합구조를 혁파하고 불평등 해소와 같은 시대적 과제를 해소해가는 리더십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거래적 리더십이란 기득권 체제의 유지를 대가로 지지를 구하면서 권력을 누리는 리더십이다.

이에 준하여 볼 때,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변혁적 리더십의 외양을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거래적 리더십에 가깝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권 출범 직후 정부조직을 개편하였다. 대선 때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도 추진하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관료사회의 적폐를 척결하겠다고 했다. 4대 개혁이라고 이름 짓고 공공, 노동, 교육, 금융 개혁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적 조치의 목표가 새로운 질서의 구축을 위한 기득권 담합구조의 혁파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실제로 그러했는지 대단히 회의적이다.

정부조직 개편과 관련해 눈에 띄었던 것은 미래창조과학부의 신설과 행정자치부의 안전행정부로의 개편이었다. 하지만 창조경제의 정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 되었고,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운영에서도 대기업 독점 시비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터져 행정자치부, 인사혁신처, 국민안전처로 다시 개편하였다. 하지만 메르스 사태를 거치며 제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경제민주화도 성장가치를 포괄하면서 재벌개혁의 의미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을 추진하던 2013년 상반기를 거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가 성장과 배치되어서도 안 되며, 대기업을 옥죄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고 못박았다.

결국 박근혜 정권의 경제민주화 정책에 대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시장구조를 만드는데 미흡했다는 비판적인 평가가 내려졌다. 관료사회 적폐척결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아예 감감무소식이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예산과 인력 지원의 칼을 쥔 관료사회의 완강함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4대 개혁의 경우는 공무원 연금개혁을 제외하고는 아직 뚜렷한 결과물을 내오고 있지 못한 가운데, 규제완화와 성과주의를 위주로 하여 오히려 기득권에게 유리한 담합구조를 강화하는 역효과를 낼 우려가 높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 리더십 복원의 길

박근혜 대통령이 “왜 헤드십에 가까운 리더십을 구사하고 있느냐”라는 물음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왜?’라는 물음은 자꾸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을 문제 삼게 한다. 따라서 문제의 극복도 개인에게서 찾게 된다.

하지만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복판을 관통해 대통령까지 오른 정치인의 리더십 특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더군다나 대통령은 개인이라기보다 하나의 역사이고 세력이고 현실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물음의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어떻게 헤드십에 가까운 리더십을 구사할 수 있느냐”로. 이에 대한 답은 경쟁자들, 즉 야당 지도자들의 상태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리더십은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리더십은 경쟁관계 속에서 그 특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야당 지도자들의 리더십 역시 박근혜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적 동의와 신뢰에 바탕한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한 상태다. 낡은 이념과 계파를 넘어 기득권 체제를 혁파하는 변혁적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개인적 특성,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을 추종-모방할 수 있도록 하는 요인이며, 헤드십에 가까운 리더십으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고, 그것을 더 강화할 수 있는 이유이다. 대안적 리더십이 미약 혹은 부재한 상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지위 권력을 극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 리더십 복원의 길은 단 한 가지이다. 상대방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먼저 변화하는 것이다. 야당 지도자들이 먼저 진정한 리더십의 보유자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전혀 새로운 도전자를 발굴하고 등장시키든지.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