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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정창수의 ‘나라살림을 제대로 바꾸는 법’]셧다운, 미국은 되고 한국은 안되는 이유/정창수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31 1월 [IF Media] [정창수의 ‘나라살림을 제대로 바꾸는 법’]셧다운, 미국은 되고 한국은 안되는 이유/정창수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정창수의 ‘나라살림을 제대로 바꾸는 법’]셧다운, 미국은 되고 한국은 안되는 이유

출처 : 주간경향

한국에서 예산이 통과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부가 국회에서 예산안이 의결될 때까지 대한민국 헌법 제54조 제3항에서 정한 경비를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하는 ‘준예산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 윙(The West Wing)’은 백악관 서쪽의 비서실 간부들이 근무하는 곳을 일컫는 용어다. 이곳에서 미국 대통령과 참모진이 미국을 움직인다.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웨스트 윙> 시리즈는 미국 NBC를 통해 1999년부터 지난해까지 방송됐으며, 국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즐겨 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이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가 예산안 미처리로 인한 셧다운 상태다. 드라마에서 클린턴을 연상시키는 버틀렛(마틴 쉰) 대통령이 예산안 미처리로 인한 셧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야당인 공화당 원내대표 국회 사무실로 찾아간다. 깜짝 방문에 대응하지 못한 공화당 측이우왕좌왕하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나자, 보좌관들은 대통령에게 지금 즉시 돌아가자고 한다. 문전박대의 옹졸한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작전이다. 그리고는 걸어서 백악관으로 돌아간다. 일종의 ‘시위’인 셈이다. 대통령은 우세한 입장에서 협상을 이끌어 예산안을 처리하고 셧다운 사태를 해결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보던 <웨스트윙>

1월 말 미국의 가장 큰 이슈는 바로 이 셧다운이었다. 1월 20일 오전 0시(현지시간)를 기해 미국 연방정부는 업무 대부분을 정지하는 셧다운에 들어갔다. 1974년 ‘의회 예산법’이 만들어진 이후 19번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은 셧다운 69시간 만에 잠정합의를 이끌어내 위기를 막았다.

한국인들 대부분에게 셧다운은 와닿지 않는다. 한국에는 이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셧다운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미국은 의회에서 예산안 합의에 실패하면 미 연방정부는 셧다운 상태에 돌입한다. 정치권이 예산안에 합의할 때까지 200만명의 미국 공무원 중 군인, 경찰, 소방, 우편, 항공 등 국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에 직결되는 ‘핵심 서비스’에 종사하는 필수인력을 제외한 연방공무원 80만~120만명이 강제 무급휴가를 떠나게 된다. 남은 공무원들은 업무를 계속하지만 예산안이 결정돼야 보수를 받을 수 있다.

미국 법은 정부가 쓸 돈을 정하는 세출예산안이 반드시 상원의 승인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권력분립의 한 수단이다. 행정부가 내놓은 예산안을 토대로 상·하원은 매년 10월 1일부터 다음해 9월 30일까지를 회기로 하는 다음해의 예산안을 편성하고 최종적으로 상원에서 이를 승인한다. 정부가 쓰는 돈을 의회에서 꼼꼼하게 살피고 승인해 주는 것이다. 이는 의회의 고유권한이기도 하다.

이때 상원이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정부는 ‘재정공백’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상황이 셧다운이다. 하지만 회기 때마다 셧다운이 일어나면 안 된다. ‘임시 지출예산’ 또는 ‘잠정 예산안’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는 이유다. ‘전년도에 쓰던 대로 일단 쓰자’는 데 의회가 합의해 주면 연방정부의 업무는 전년도 예산의 틀에 따라 계속된다. 지난해 10월 1일 전에 합의에 도달했어야 할 2018년도 예산안 역시 세 차례에 걸친 ‘임시 지출안’이 통과되며 미뤄졌다. 1월 19일은 이 세 번째 안이 종료되는 날이었다.

이번 셧다운에서 쟁점이 된 건 ‘다카 제도’(불법체류청소년 추방유예제도)의 폐지 여부였다. 오바마 정부가 제정한 이 행정명령은 16살 이전에 부모를 따라 미국에 불법입국한 뒤 5년 이상 거주하고, 재학 중이거나 취업 중인 31살 미만 청년의 추방을 유예하고 있다. 2년마다 허가증을 갱신하면 외국 청년들의 미국 내 교육과 노동의 자유를 보장해준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9월 이 제도의 연장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 다카 제도에 준하는 수준의 보완입법을 주장하며 이를 예산안 처리와 연계시켰다.

또 하나, 경제문제도 있다. 미국 연방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조직이다. 2016~2017년 연방정부의 총 예상 지출은 약 4조1470억 달러(4434조8000억원)이다. 이 거대한 기구가 문을 닫으면 미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2013년 오바마 행정부가 16일 동안 셧다운을 했을 때,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이 기간 200억 달러의 피해가 초래됐으며 4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0.5%포인트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미국 다카 제도의 향방에 따라 우리 국민 7000여명의 운명도 갈릴 예정이다.

한국에서 예산이 통과되지 않으면…

셧다운 제도는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단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신데렐라와 같은 일이 있다. 바로 자정(밤 12시)이 되면 온라인 게임 접속이 불가능해지는 셧다운 제도다. 한국의 청년들이 미국의 셧다운에 반응한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한국에서 예산이 통과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할 경우, 정부가 국회에서 예산안이 의결될 때까지 대한민국 헌법 제54조 제3항에서 정한 경비를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하는 ‘준예산제도’ 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독일의 임시예산제도를 모델로 하여 1960년 3차 개헌 시 이를 도입하였으나, 중앙정부는 한 번도 시행한 적이 없다. 2016년 처음으로 경기도에서 준예산이 집행되었다. 기초자치단체에서는 2004년 전북 부안에서 핵폐기장 문제로 예산이 부결되는 사태 등 몇 건이 있었다.

헌법 54조는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한 때에는 정부는 국회에서 예산안이 의결될 때까지 다음의 목적을 위한 경비는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헌법이나 법률에 의하여 설치된 기관 또는 시설의 유지·운영, 법률상 지출의무의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의 계속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규사업만 안 된다는 것이다. 신규예산이 전체 예산의 1% 정도에 불과한 한국으로서는 설사 의회에서 예산안이 부결 혹은 통과되지 않더라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 셈이다.

차이의 핵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예산의 법률 유무다. 미국은 법률이라 예산에 대한 통제를 국회에서 하는 것이고, 우리는 법률이 아니기 때문에 국회가 예산에 대한 통제를 하지 못한다. 이번 개헌에서는 예산안 법률주의 등 의회의 예산 권한을 강화할 필요가 있고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다. 반대하는 측은 기재부 등 관료들이다. 의회에 대한 불신 때문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막으면 문제는 존속하게 된다. 그래서 의회의 존재가 개혁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의회와 관료 모두 믿지 못하겠다면 둘이 경쟁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효율성이다.

정창수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