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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찬반의 굴레를 벗는 정치 /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13 7월 [IF Media] 찬반의 굴레를 벗는 정치 /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찬반의 굴레를 벗는 정치]

출처: 경향신문

 

[세상읽기]찬반의 굴레를 벗는 정치

찬반의 굴레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실천력을 보고 싶다. 사드 배치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는 혹은 논쟁도 제대로 벌이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을 보며 든 생각이다. 특히 여론에 떠밀려 찬반 여부 표명을 두고 당 내부가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을 보며 든 생각이다. 찬반은 분명 중요한 정치적 언어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과정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결단의 언어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협력의 한 형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전문가와 대비되는 누군가를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호명한 것은 교육부의 한 고위공무원이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한 것처럼 그 누군가를 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생업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꼭 알아야 할 것은 알고 있는 ‘보통사람들’, 즉 우리들 대부분이 하루하루 살아가며 처해 있고 겪고 있는 ‘불가피한 한계’를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사실 전문가들도 무지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전공이 아닌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무지한 사람들이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적응하며 살아가지만, ‘뭣이 중한지’ ‘어찌 하는 것이 좋은지’를 정부나 정당의 설명을 통해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바로 이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가는 정치적 언어가 ‘찬반의 언어’이다. 이 사람들은 또한 잘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신뢰하는 세력의 찬반 여부에 따라 입장을 정한다는 점에서 찬반의 언어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크다.

그런데 유의할 것이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를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라고 정의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 정의는 찬반의 언어를 사용하되, 찬반 그 자체를 옳음으로 가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서로 다른 관점과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고 경쟁하고 협력하는 세계이다. 이 때문에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과 좋고 나쁨이 대체로 분명치 않다.

이런 세계에서 찬반은 차라리 지렛대의 쓰임새를 갖고 있는 언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찬반은 보다 덜 나쁘고, 보다 더 나은 대안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언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찬반 결정 이후’가 찬반 결정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이를 감안치 않고 찬반 결정 그 자체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은 그것을 기준으로 경쟁자와 싸워야 한다. 이때 찬반은 단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옳고 그름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만다. 이리되면 찬반을 넘어서서 새로운 대안을 발견할 수 있는 정치의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더민주의 전략기획위원장인 이철희 의원 등은 사드 배치에 대해 원론적으로는 반대하지만, 현재로서는 섣불리 찬반의 입장을 정하기보다 의도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취하자는 ‘전략적 모호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찬반을 거치지 않고 우회로를 찾아보려 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민주가 선명한 입장을 밝히라는 당 안팎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을까? 전략적 모호성을 무기로 삼으려면 전투적 야당론에 기댄 공세를 견뎌낼 단단함이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임을 털어놓는 솔직함도 있어야 한다. 언제 어떤 입장을 정하고 밝힐지를 짚어내는 영민함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회의원들이 “조사 없이 발언 없다”는 격언을 새기며 사비를 들여서라도 동분서주하며 국제정세를 살피고 사드 배치의 찬반이 가져올 실제 영향을 가늠하는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궁극엔 찬반보다 더 간명한 언어로 국민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 계획대로 하면 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전략적 모호성은 ‘궁극적 명확성’에 다다라야만 의미가 있다. 그러지 못하면 찬반의 굴레에다 오히려 비겁의 굴레마저 덧씌우는 어리석음으로 끝날 수도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