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IF Media] ‘청와대-검찰’ 연립정부, ‘푸른 시간’이 왔다 /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26 8월 [IF Media] ‘청와대-검찰’ 연립정부, ‘푸른 시간’이 왔다 /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Warning: Division by zero in /host/home1/themirae/html/wp-content/themes/themirae/includes/shortcodes/shortcode-elements/image-slider-no-space.php on line 93

[‘청와대-검찰’ 연립정부, ‘푸른 시간’이 왔다]

출처: 프레시안

[프레시안 뷰] 검찰 권력과 민주주의, 양립할 수 없다

푸른 시간(Blue Hour)

마침내, 개와 늑대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르는 순간이 있다.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 저만큼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순간이 발생하는데, 바로 그 시간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다.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이 시간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낮이라고 하기엔 밝음의 강도가 약하고 밤이라고 하기엔 어렴풋하게나마 사물의 형체가 구별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옮아가는 ‘불분명한 시간’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개와 늑대,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간이다. 이 불분명한 경계는 때로 늘 익숙하던 세계를 갑자기 낯설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신수정, “개와 늑대 사이의 인간” (<한겨레> 2004년 5월 28일자))

개와 늑대의 시간은 다른 말로 ‘블루아워'(The blue hour)라고도 합니다. 프랑스어 표현인 l’heure bleue에서 유래한 이 표현은, 해질녘의 박명이 지는 시간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이 시간대의 하늘이 완전히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으면서 푸르스름한 빛을 띠어 매우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위키피디아’의 ‘블루아워’ 항목)

어김없이, 한국 정치에도 푸른 시간이 왔습니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연립정부

연립정부가 붕괴하는 시점입니다. 한국에 무슨 연립정부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3당합당이나 DJP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와대-검찰’ 연립정부를 말합니다.

대통령 선거라는 극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우리나라는 청와대와 검찰의 타협을 통해 통치됩니다. 1997년 이전의 연립정부는 대선 전에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대선이 박빙으로 진행된 그 이후에는 대부분 대선 이후에 형성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청와대와 검찰의 연립정부라는 이 권력구조는 대체로 정권 초기에 검찰이 성의를 보임으로써 시작됩니다. 검찰은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신임 대통령의 문제거리를 없애주고, 때에 따라서는 패자 측을 일망타진하기도 합니다.

검찰이 승자를 존중하는 전통은 실로 오래되었는데, 1994년,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35명이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고소되었을 때, 서울지검 공안1부장 검사는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들어 불기소 처분 합니다.

당시 불기소 처분을 내린 공안1부장 검사는 이후 한나라당에서 3선의원을 지냅니다. 일회적이고 우발적인 사건 같지만, 바로 여기에 연립정부 구성의 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부장 검사 이상의 많은 검사들이 선망하는 검찰총장 직은 아쉽게도 한 명 밖에 갈 수 없습니다. 전관예우를 받아 돈을 버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약관을 지난 어린 나이부터 ‘영감’ 소리를 들어가며 권력을 향유해 온 이들이 거기에 머물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지금도 나이에 상관없이 ‘영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서초동 ‘영감’에서 여의도 ‘영감’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연립정부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청와대-검찰’ 연립정부라고 하면, 국회는 어찌되느냐고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당선증은 선관위가 아니라 검찰에서 줍니다. 선관위에서 당선증을 받은 후에도, 90일 내에 ‘내사 종료’라든지 ‘불기소 처분’, ‘약식 기소’ 같은 검찰의 당선증을 받아야 비로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된다고 다가 아닙니다. 법안이나 예산안을 놓고 원내 협상을 벌이던 야당의 원내대표가 갑자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 여의도에서는 십중팔구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서 내사 중’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진위를 떠나 소문만으로도 당사자는 움츠러들게 마련입니다.

검찰에 빽도 하나 없는 국회의원, 정치 못합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오다

그래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이러한 연립정부가 구성되고, 붕괴하고, 재구성되는, 우리 정치에서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의 재현일 뿐입니다.

청와대-검찰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핵심은 단연 민정수석입니다. 민정수석은 검찰과 청와대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검찰에 청와대의 의중을 전달하고, 때로는 그 반대로 청와대에 검찰의 의견을 알리기도 합니다.

(이 정부에서는 다소간 변형이 있기도 했는데,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의 김기춘이라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자리에 있는 동안은, 민정수석의 역할이 별 게 없었습니다. 며칠 전 별세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세칭 문고리 3인방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졌고,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항명한 뒤 사퇴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민정수석은 검찰 뿐만 아니라 모든 사정기관의 인사권에 또한 관여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이철성 경찰청장의 사례에서 보듯, 어떠한 비리도 민정수석이 한 번 눈감으면 없던 일이 됩니다.

반대로 민정수석이 관심을 가지면 없던 죄도 생겨납니다. 설령 그 죄가 나중에 무죄로 밝혀지더라도 큰 상관없습니다. 민정수석은 이미 자리를 옮겼을 테고, 해당 검사는 승진한 뒤입니다.

만약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면, 그 민정수석은 법무장관이나,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그 검사는 검찰총장이나 국회의원, 혹은 후임 민정수석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진경준, 우병우 두 사람은 본인들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 작년만 되었더라도, 혹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나 대담한 진경준의 행보에, 누군가가 뒤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병우가 나왔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보통 같으면, 그냥 덮고 말 일입니다.

이번에는 덮이지 않았습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개와 늑대인지 확인할 수 없는 시간, 그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때를 읽었고, 정권 재창출이 걱정된 <조선일보>는 우병우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청와대는 전당대회에서 금의환향한 이정현을 송로버섯과 샥스핀으로 맞았지만, 장강의 거대한 물줄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입니다.

민주공화국 vs 검찰공화국

진경준이 구속되고 우병우가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리니 이제야 세상이 바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수사권이 검찰로 넘어간 이후, 혹시 검찰이 우병우를 구속이라도 시키면 그래, 하고 무릎을 탁 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나는 그 반대야.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게 바로 이 시간이야.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청와대-검찰 연립정부는 대체로 4년을 주기로 합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오면, 검찰은 연립정부에서 손을 뗍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초저녁 어스름이기도 하지만, 아침 여명이 밝아올 때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동안,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기도 하지만,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해가 뜨면 이 개들이 다시 늑대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래 검찰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조직일 것입니다. 권력자나 혹은 검찰 조직 스스로를 위해 일하라고 만든 조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조직이 속한 사회를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어려워집니다.

검찰 개혁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오기 있습니다. 공수처 신설에서, 경찰의 수사권 독립, 검사장 직선제 등 충분히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방안들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론화가 어렵습니다. 검찰의 눈치를 보느라 정치인들이 이 논의를 하기에는 버겁습니다. 사실 살아있는 권력조차 정권의 명운을 걸고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어쩌다가 검찰 개혁이라는 과제가 이런 지경에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검찰 개혁 없이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검찰 개혁 없이, 우리는 용산 참사의 진실도, 국정원 댓글 사건의 진상도, 백남기 농민이 왜 쓰러졌는지도, 방산비리는 왜 근절되지 않는지도, 그리고 세월호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지 검찰공화국인지는 헌법의 글자를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검찰 권력을 그대로 두고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자각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