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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최순실 게이트’를 대하는 대구민심 /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08 11월 [IF Media] ‘최순실 게이트’를 대하는 대구민심 /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홍일표의 미래정치]’최순실 게이트’를 대하는 대구민심

출처 : the 300

기우였다. 대구 중심가인 반월당역을 나올 때, 그리고 대구백화점 거리를 지날 때도 집회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지난 토요일 저녁 동성로는 여느 때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2·28공원 쪽으로 접어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000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있었다. 서울 인구 기준으로 해 본다면 적어도 1만5000명 정도는 되는 셈이다. “박근혜 퇴진”, “이게 나라냐”는 문구가 거리 곳곳에 넘쳤고, “새누리당 해체하라”,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여기가 정말 대구인가 싶었다. 같은 시간 서울 광화문을 메운 20만명 시민들의 함성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부끄럽다.”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기들이 너나없이 뱉어낸 말이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한 친구는 “내 손목을 짤라뿌고 싶다”고 했다. 새누리당 활동을 꽤 열심히 하는 친구다. 다른 친구들도 대부분 자영업자거나 회사에 다니는 월급쟁이들이다. “증세 없는 복지한다카두만 세금만 빡빡 끌거 가더라. 경기가 안 좋아도 박근혜가 하니까 참았는데 최순실이가 머꼬. 하이구야.” 배신당했다, 참담하다, 화난다는 얘기가 술자리 내내 끊이질 않았다. 40대 중반의 대구 남자들끼리 만나서 정치 얘기를 길게 하기 란 어렵다. 그 자체를 싫어한다. 더구나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에 대한 비난이 주된 경우는 정말 드물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밤 늦은 시간, 대구 수성구 들안길 어느 술자리에선 그런 일이 실제 벌어졌다.

“어렵겠제?” 수성구 시지에 사시는 어머니는 대통령과 최순실 얘기가 나오자 되물으셨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동정과 연민만으로는 본인도 감당이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대통령 국정지지도가 사상 최저인 5%를 기록한 지난 주 갤럽 여론조사에서 대구경북지역은 10%를 기록했다. 서울의 2%, 호남의 0%에 비해서는 높지만 대구경북 역시 사실상 지지붕괴로 보는 게 맞다. 어머니는 “대통령이 우짜자고 그랬노”라며 고개를 저으셨다. 경북 경산 하양읍에서 들른 약국의 70대 약사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자 곧바로 “단단히 홀린기라. 저 사이는 못 끊는다. 그냥은 안 된다”며 대통령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경북 군위에서 만난 60대 중반 아주머니도 “얄궂그러 이게 무신 일인교”라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불쌍한 근혜’라는 얘기를 꺼내는 이는 없었다. 오랜 세월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해 왔던 그들 눈에도 최순실과 정유라는 불쌍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납니다.” 대구대학교 1학년 학생들의 목소리다. 수업 시간마다 신문 스크랩한 내용으로 간단한 토론을 한다. 정유라 특혜의혹이 불거진 무렵 학생들 상당수가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 왔다. 너무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사건이라는 반응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사실까지 확인되자 대구 지역 대학생들의 시국선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의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렸다. 지난 주말 동성로 집회 앞줄은 교복 입은 학생들 자리였다. “순실이 만난다고 샤샤샤머니즘” 등 재기 넘친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앉았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멋진 발언으로 7분간의 명연설을 마무리 한 여고생에게 쏟아진 환호는 ‘대구의 오늘’과 ‘내일의 대구’에 대한 어른들의 미안함, 반가움, 고마움이 뒤섞인 것이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대구경북의 콘크리트 지지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고담대구’라는 비아냥이 인터넷에 넘쳐날 정도다. 지지율은 높았지만 막상 투표율은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굳이 투표할 필요도, 투표할 이유도 없었다. 결과는 늘 같았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지난 총선에서 김부겸 의원이 대구 수성갑에서 당선된 때부터다. 윤종화 대구시민센터 상임이사는 “김부겸 당선의 60~70%는 분명 후보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30-40%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고 했다. 대구 역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김부겸 의원이 정치와 경제, 삶의 방식까지 포함한 ‘총체적 변화’를 열망하는 대구민심(民心)에 먼저 반응했다는 설명이다.

대구가 과연 그렇게 변했나. 대구시민들이 정말로 변화를 열망하나. 아직은 잘 모른다. 최순실 덕분에 박근혜 대통령을 공주도, 여왕도 아닌 ‘세속의 대통령’으로 바라보게 된 게 변화의 전부일 수도 있다. ?200만 인구의 대구는 여전히 계모임이나 제사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도시다. 설령 대구출신이라 하더라도 ‘출향했다’는 이유로 파견 나온 직원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 기업 사람들이 고향 대구로 가길 꺼려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다단계 사건 피해자가 가장 많은 도시도 대구이다. 조희팔 사건이 대표적이다. 진입장벽이 높지만 그것만 넘어서면 너무나 굳건한 신뢰체계가 작동한다. 그때부턴 의심도 금물이고 비판은 자제된다. 당해도 당했다고 말하길 꺼려한다. ‘우리 편’, ‘대구사람’이 되기가 어려운 일이지 일단 되면 대구만큼 편한데도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것이 지금까지 대구에서의 정치와 경제가 작동한 사회적 기반이자 구조였다. 대구가 변했다면, 아니 변하려면 결국 근본으로서의 사회적 기반과 구조까지 변해야 한다.

대구는 변하고 있다. ‘참담하다’, ‘부끄럽다’, ‘실망했다’라는 것은 ‘내 잘못’의 언어, 즉 성찰과 반성의 언어다. 그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을 비판하고, 정부여당과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하는 ‘남 잘못’의 언어가 아니다.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사람들에 대해 ‘자존심이 강하다’고들 한다. 다르게 말하면 ‘내 잘못을 인정하길 꺼린다’는 말이다. 며칠 동안 직접 접한 대구사람들의 고민은 ‘대구 사람’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고민했고, 분노했고, 행동했다. 동성로에 모인 3000명과 광화문의 20만명은 분명 ‘같은 국민’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어디로 움직일 지 속단하기 어렵다. 정치적으로 부동(浮動) 상태다. 새누리당만 아니라 민주당 등 야당, 특히 대권후보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의 ‘우리 편’임을 ‘대구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여간 어렵지 않은 숙제다. 하지만 꼭 풀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적 변화에 상응하는 정치적 선택이 가능해 진다.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