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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edia] 현실을 핑계 삼지 말라 /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08 6월 [IF Media] 현실을 핑계 삼지 말라 /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현실을 핑계 삼지 말라]

출처: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위험한’ 나라이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메르스 사태가 확인시켜주고 있다. 연이은 재난 발생만을 갖고 그리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는 재난관리에 영 ‘젬병’이다. 신속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마치 무능함을 드러내기 위해 국정을 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정부의 무능! 대한민국을 위험한 나라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나마 이번 메르스 사태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 지자체장들이 나서서 상황을 바꿔냈다. 이들의 적극적인 관여와 대응으로 정부가 지자체와 공동 협의체를 구성하고, 병원 공개와 정보 공유를 통해 주민들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등 보건 감시 활동과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정부가 갑자기 유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이 안전한 나라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메르스 사태가 진정된다 해도, 대한민국에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치명적인 해를 가할 수 있는 또 다른, 아니 더욱더 무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원전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고리 1호기 같은 노후 원전 문제가 심각하다.

고리 1호기는 1978년 가동을 시작해 40년이 다 되어가는 원전이다. 2007년 6월 수명 만료로 가동이 중단되었으나, 2008년 1월에 10년간의 재가동을 승인받아 다시 운영되어왔다. 하지만 잇따른 고장으로 폐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왔다. 2012년 2월 체르노빌이나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처럼 노심이 녹아내려 방사능 누출이 일어날 뻔했던 고장 사태를 겪은 후 특히 그러했다.

대한민국 전역이 고농도 오염지역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시민사회는 물론,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서병수 부산시장을 비롯한 정치권도 폐로로 입장을 정했다. 이 때문에 재연장 신청 기한인 6월18일을 앞두고 폐로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불확실하다는 관측이 점점 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재연장 신청을 하기로 한 가운데, 산업통상자원부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부산 지역 의원들과 윤상직 산업부 장관의 회동까지 무산되어 부정적 전망이 더욱 높아진 상황이다. 정부가 또 문제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대책도 없이 신재생에너지로 전부 바꾸자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 아닌가”라면서 탈핵에 반대해 왔다. 정부는 폐로 여론이 높음을 감안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 근거해 폐로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원전 한 기당 폐로 비용이 6000억원 정도로 막대하고, 소요 기간도 15~20년으로 오래 걸린다는 것, 예산도, 계획도, 법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폐로 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 등이 그 이유일 것이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등이 2014년에 펴낸 ‘핵마피아 보고서’에 따르면, 사실상 비정규직이 원전 노동자의 60%를 차지하는데, 2009~2013년 동안 이들의 평균 방사선 피폭량은 한수원의 최대 15.4배이다. 임금은 정규직의 3분의 1 정도 수준이다. 작년에는 사망사고가 잇따르기도 했다. 한빛 원전에서는 냉각수 방수로에서 잠수작업을 하던 중에 2명이, 월성 원전 3호기에서는 방수 수문 설치와 펄 제거 작업을 하던 중에 1명이 변을 당했다. 신고리 원전 3호기 건설현장에서는 3명이 질소가스 누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누출 탐지기도 없고, 환풍기는 있었으나 가동되지 않아 일어난 사건이었다.

위정자들이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가 ‘현실’이다. 정책 결정 시 고려해야 할 사항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현실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가? 또 노동 약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가? 위정자들은 현실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용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위정자들은 현실이란 말 앞에 ‘불가피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할 때에 특히 그리한다.

이제 그런 현실과는 결별해야 한다. 위험 감수의 용기와 불가피한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을 바꿔내야 한다. 더 이상 현실을 핑계 삼아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감추려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무능한 정부가 유능한 정부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김윤철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