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7월 [IF Media] 촛불혁명은 주권자 민주주의로 제도화 되어야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
(시론)촛불혁명은 주권자 민주주의로 제도화 되어야
출처 : 뉴스토마토
우리나라의 촛불혁명은 근대의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인가. 이를 보는 해외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정치학과를 거쳐 유럽대학연구소 석좌교수로 있는 필립 슈미터(Philippe Schmitter)는 촛불혁명을 다소 평가절하했다. 그는 촛불혁명이 정치세력 간 타협의 산물이며, 이미 존재하던 또 다른 정치세력으로의 권력이양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또 촛불혁명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유형을 만들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계급론을 바탕으로 한 정치사회학자가 보기에 촛불 민주주의는 새로운 계급이나 세력의 등장이라고 하기 미흡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최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방문, ‘촛불혁명 이후 수평적 정책조정의 중요성과 한계’라는 주제로 강연한 가이 피터스(Guy Peters) 피츠버그대학 교수는 촛불 민주주의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고 긍정했다.
최근 미국 등 세계의 선거 결과들은 근대 시민혁명 이후 등장해서 300여년 동안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이 됐던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기존 민주당과 공화당의 주류 정치인보다는 아웃사이더로 평가받았던 버니 샌더스나 도널드 트럼프가 대중적인 돌풍을 일으키면서 대선의 의제들을 주도했다. 주류 정치의 대표 격인 힐러리 클린턴은 대중 선동에 능한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트럼프는 미국 제도 정치로부터 소외된 저소득층과 백인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이는 세계적으로 흐름타고 있는 반 체제(Anti Establishment)의 정점을 찍었다.
반 체제 정치는 이미 유럽에서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과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는 기존 제도 정치에 대해 거센 도전을 연이어 하고 있다. 이 새로운 흐름은 기존 대의정치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었다. 주로 내각책임제 국가인 이들 나라에서는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들이 시민들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했고, 그 결과 시민적 저항이 폭발해 정당 정치를 넘어선 ‘광장의 정치’를 열었다.
한국의 촛불혁명은 세계적 흐름이 된 반 체제 정치의 새로운 경향과 제도 정치의 절묘한 조화다. 2016년 10월29일 시작해 2017년 3월11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된 시민대집회에서는 광화문을 포함 평균 100만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20주간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든 연인원 1700만명의 시민들이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일방적인 시민행동으로만 결정된 것은 아니다. 2016년 12월9일 여야를 넘어선 국회의원 234명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 탄핵 소추를 결정했고 2017년 3월10일에는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8대 0’이라는 전원일치로 탄핵을 결정했다. 헌재의 결정문도 어떤 전제조건 없이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간명한 내용이었다. 혁명 과정에서 유혈충돌 없이 시민의 요구를 제도적 기관들이 그대로 수용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 달리 해석한다면 한국의 제도 정치권과 관료제, 사법기관들이 국민적 변화와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할 만큼 성숙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촛불혁명은 치안과 질서를 유지할 행정 관료제, 그리고 헌재라는 입법적 사법기관들이 국민적 요구를 모두 받아 들일만큼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한 축으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촛불 민주주의를 ‘융합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대의제를 근간으로 한 간접 민주주의와 시민대집회의 직접 민주주의가 절묘히 융합,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성과를 성취했다는 평가다. 근대 대의 민주주의가 국민의 대표를 뽑고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위계질서에 의존한 관료제를 두는 것과 달리 촛불 민주주의는 근대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21세기 정치를 보여줬다는 설명이다.
물론 촛불혁명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줬음에도 여전히 이를 제도화하는 데는 지난한 문제가 남았다. 촛불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가이 피터스 교수조차 “촛불혁명뿐만 아니라 오렌지혁명 등 모든 혁명은 위대했지만, 그 이후 제도로서 국민들의 삶이 달라지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촛불혁명 이후 요구되는 것은 혁명을 제도화하는 것이고, 시민의 참여가 일상화되도록 혁명 후 들어선 새 정부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민적 관심을 모은 ‘광화문 1번가’는 촛불혁명의 제도화에 대한 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행정자치부 등이 새로운 정부 혁신으로 준비하고 있는 ‘열린 혁신’은 정책도 시민들과 공동 생산하는 새로운 실험에 들어서고 있다.
촛불 민주주의는 주권자 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로 국민 스스로가 자신을 대표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이다. 촛불혁명 초기에 일부 단체들은 6월 항쟁 때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처럼 스스로가 국민의 위임을 받은 단체라고 자임했다. 하지만 촛불 시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지금은 ‘내가 나를 대표하고 내 삶을 스스로 바꾸는’ 국민 주권의 시대다. 촛불혁명 이후 시민들은 주권자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고 그 제도화 과정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내년 헌법개헌까지 이 제도화 과정은 근대 대의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로 실험 중이다. 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해외에서 일고 있는 촛불혁명에 대한 논란을 넘어서 주권자 민주주의가 제도로 정착되길 희망한다.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