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1월 [IF Media] 한국의 아이히만/ 이동연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세상읽기] 한국의 아이히만
출처 : 경향신문(본문), 한국NGO 신문 은동기 기자(사진출처)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장 악랄하게 가담한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수많은 증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법정 재판을 참관하면서 아렌트가 내린 결론은 ‘악의 평범성’이었다. 유대인을 색출하고, 그들을 열차로 호송하는 일을 맡았던 아이히만의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심문하고 진술하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행위를 ‘악의 평범성’으로 정의했다. 아이히만은 검찰의 살인죄 기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떤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아렌트가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 아이히만과 같은 추악한 악을 지나치게 인간의 보편적 악으로 설명하려 했다고 비판했지만, 정작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말하려는 악의 평범성은 매우 멍청하고 심오한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들, 자신의 잘못을 모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자들의 보편적 속성이다.
국정조사에 출석하여 증언하는 내내, 특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내내 자신은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김기춘에게서 아이히만과 같은 악의 평범성을 느낀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오스트리아에서의 유대인 추방자 명단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신·공안 동맹체들은 예술이란 영토를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1만명에 가까운 예술가들을 추방하려 했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박근혜와 동맹하여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을 주도했다. 박근혜와 김기춘은 마치 유대인 학살의 총책 하이드리히와 그 하수인 아이히만과 같다. 그들은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말로 ‘최종해결책’이란 그들만의 언어규칙을 쓰듯, 김기춘과 유신·공안 동맹체는 예술가들을 추방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라는 언어규칙을 사용했다.
블랙리스트는 문화공안정국의 인장이자, 유신의 징표이다.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강탈해서 만든 것이 5·16 장학회인데 이 장학회의 첫 수혜자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검사였던 김기춘은 법무부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유신헌법의 기초를 만든 10명의 실무진 중 하나였다. 김기춘은 나중에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 잔심부름 외에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아이히만이 한 말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는 칠레의 독재정권하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진상조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에스코바르는 진상조사를 총괄하는 인권 변호사이고, 그의 부인 파울리나는 독재정권하에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에스코바르는 어느날 타이어가 펑크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다, 50대의 시골 의사 로베르토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에까지 오게 된다. 그런데 파울리나는 남편을 태워준 그 의사 로베르토가 15년 전에 자신을 성고문한 자임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비록 그녀는 안대를 하고 고문을 당해 로베르토를 본 적은 없지만, 그자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파울리나는 결국 로베르토를 집에서 체포하고 몸을 결박한 후 그에게 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한다. “너를 죽이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의 슈베르트를 들을 수 있도록.”
김기춘은 대한민국의 로베르토이다. 그는 공안검사로서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수많은 양심수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리고 유신의 딸을 보좌하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가들의 명예를 짓밟고, 예술을 검열했다. 검열당한 예술가들은 마치 죽음과 소녀에 나오는 파울리나와 같다. 그녀가 로베르토를 향해 총을 겨누듯이 우리는 유신의 역사적 유산인 블랙리스트를 향해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 블랙리스트는 유신 회귀의 악귀이자 역설적으로 그 종말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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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