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3월 [IF Media] 투표로만 말할 수 있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다 /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특별기고]투표로만 말할 수 있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다
출처 : 한겨레
21세기의 명예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시민은 광장에서 승리했고, 법원은 그 사실을 추인했다. 국회가 압도적 다수로 대통령을 탄핵했고 헌법재판소는 전원일치로 탄핵을 인용했지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은 그러한 형식적 법 절차가 아니다. 정치적 리더십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던 야당들을 탄핵으로 이끈 것도, 신속한 심리와 판결로 헌법재판소를 견인한 것도, 모두 거리의 시민들이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무혈혁명을 통해 의회주권을 확립했지만, 21세기 한국에서는 시민들 스스로가 헌법에 명시된 인민주권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랑이 그렇듯 혁명도 한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축제가 끝나면, 우리는 광장의 승리를 뒤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혁명은 아름답고 승리는 달콤하지만, 그 열매가 곧바로 시민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 준다. 젊은 학생들의 목숨과 바꾸어 독재자를 몰아낸 4·19 이후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80년 광주에서 우리는 군부독재의 연장을 막기 위한 유례없는 민주화의 열망과 희생을 목도했으나, 그들은 전두환의 집권을 막지 못했다. 87년 민주화의 결말은 노태우 정부의 출범과 3당 합당이었다. 시민들은 늘 광장에서 승리하고 일상에서 패배해왔다.
광장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했으나, 일상에서 우리는 억눌리고 소외되었다. 그토록 많았던 광장의 동료 시민들은 내 삶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았다. 광장의 말은 일상에서 통용되지 않았고, 우리는 그 말들을 잃어버렸다. 민주주의의 축제가 끝난 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침묵의 민주주의였다. 말이 없는 민주주의, 말하지 않는 민주주의, 말할 수 없는 민주주의.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것이었다.
시민은 사라지고 유권자만 남았다. ‘닥치고 투표’라는 말은, 늘 사실이었다. 축제가 끝나면 선거철이었다. 말은 그들의 몫이었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광장을 떠난 우리의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사랑했던 시민들은,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인어공주처럼 물거품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묵묵히 찍고, 배신당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혐오하고, 종내는 무관심으로 돌아섰다. 신성한 한 표는 거짓이었다.
촛불 이후, 우리 앞에는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누구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을, 누구는 검찰 개혁과 반민주적 정치세력의 일소를 통한 적폐의 청산을, 누구는 비정규직 차별 해소와 보편적 복지를 통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말한다. 맞다. 그런데 그것들은 어떻게 가능할까? 5월9일 새로 탄생할 정부는 이 일들을 할 수 있을까? 고백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왕자님처럼, 그들은 동화의 결말을 바꿔줄까?
‘왕은 죽었다. 국왕 만세!’ 중세의 신민들은 한시라도 왕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왕이 없는 세계는 암흑이었다. 왕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왕의 관이 닫히는 순간, 새로운 왕의 등극을 축복했다. 마치 그들처럼, 우리는 축제가 끝난 민주주의에서 새로운 왕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통치할 단 한명의 초인을 묵묵히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투표로만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유권자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표로만 말할 수 있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에게 사랑이 오지 않았듯, 목소리를 잃은 시민에게 권리는 없다. 침묵하는 시민에게서 권력은 나오지 않는다.
<대의정부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의회의 역할을 ‘말하는 것’(talking)이라고 했다. 1861년, 밀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보통선거권의 확립과 그에 기반을 둔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의회라도 그들을 대표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50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오로지 투표를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면 이것은 비통한 일이다.
혹자는 스위스식 직접민주주의인 란츠게마인데(Landsgemeinde)를, 혹자는 블록체인을 이용한 온라인 민주주의를, 혹자는 추첨제로 뽑는 시민의회를 말한다. 좋다. 그러나 제도가 곧바로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제도는 생각을, 생각은 습관을 이기지 못한다. 일상에서 침묵했던 시민이 란츠게마인데에서 갑자기 말하게 되고, 온라인 민주주의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몇백명 시민의회의 구성원을 뺀 다른 모든 시민이 여전히 정치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침묵의 민주주의다.
누가 다음 왕이 될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껏 충분히 해왔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정치가 무엇인지 시민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닥치고 투표를 멈추고 광장의 말을 일상으로 가져와야 한다.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이관후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