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3월 [IF Media] 헤어 롤과 올림머리의 숙명 / 이동연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
[세상읽기]헤어 롤과 올림머리의 숙명
출처 : 경향신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주문은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정문을 읽어 내려가는 이정미 권한대행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최고 통치자의 권력보다 헌법 수호의 가치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최종 확인했다. 그리고 그 주문의 반대편에 헌법을 위배하고, 수호할 의지도 없으며, 국민의 신임을 배신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침묵이 있다.
탄핵이 이루어지고 이틀 만에 박근혜는 헌재의 판결에 승복한다는 공식 입장 없이,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박근혜 지지자 중 3명이 헌재 앞에서 과격한 시위를 하다 목숨을 잃었고, 박사모 회원들은 헌재 재판관들을 향해 피의 보복을 선언했다. 지난 일요일 밤,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에 도착한 박근혜는 예상과 달리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민경욱 전 청와대 대변인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박근혜의 헌재 불복 의사를 대신 전했다. 삼성동 자택으로 간 다음 날, 소송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박근혜 탄핵의 일등공신(?) 김평우 변호사는 문전박대를 당했고, 대신 청와대에서 올림머리를 해주었던 미용실 아주머니가 자택으로 들어갔다. 아, 이 와중에도 올림머리를 해주어야 하는구나!
헤어 롤과 올림머리. 그것은 이정미와 박근혜의 현 상태를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이다. 판결 당일 날, 밤을 꼬박 새우고 머리 손질도 제대로 못한 채 그녀의 머리에 그대로 말린 채 있던 두 개의 분홍색 헤어 롤은 치장보다는 자기 일에 성실한 한 여성 재판관의 인간미의 징표가 되었다. 반면 세월호 재난의 7시간을 진상규명할 때, 세간의 입방아에 오른 박근혜의 올림머리는 재난의 시간도 어찌할 수 없는 컬트적 여왕 숭배의 징표가 되었다. 볼품없는 이정미의 헤어 롤은 헌법재판관이라는 권위 뒤에 감추어진 소소한 일상의 오브제였다. 반면 손질에 대략 50분이 걸린다는 박근혜의 올림머리는 평생 자기 어머니를 대리한 이미지 정치의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안 심리의 편집증의 표상이다. 헤어 롤과 올림머리라는 상반된 두 여성을 표상하는 헤어스타일에서 우리는 주권의 심판과 권력의 퇴행, 헌법의 가치와 통치의 무능이 마치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우화를 상상하게 된다.
이정미는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나온 그 다음 날 퇴임식을 가졌다. 헌법의 이름으로 박근혜를 유일하게 제압했던 이 여성의 퇴임식은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방을 뺀 그 다음 날 이루어져 더 극적이다. 이번에는 헤어 롤을 한 채 나타나지 않았다. 이정미는 퇴임사에서 한비자의 말을 빌려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정미는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어 여성으로는 최연소로 두 번째 헌재 재판관에 올랐다. 당시 그녀는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1979년 10·26사태를 보고, 수학교사에서 법률가로 꿈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숙명적으로 박정희의 딸이자, 유신정치의 최후 통치자 박근혜를 파면시키는 결정문을 낭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헤어 롤과 올림머리의 숙명은 법과 권력, 시민 주권과 유신 독재의 숙명을 대리한다. 헤어 롤은 혼자서 말 수 있다. 올림머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다. 헤어 롤과 올림머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일에 치여 차 안에서 말 수밖에 없었던 이정미의 헤어 롤과 스프레이와 핀으로 고정해 머리를 수직으로 올려 어머니와의 빙의를 기도하는 박근혜의 올림머리는 ‘소박한 워킹맘’과 ‘우울한 퀸’의 형상을 대비한다. 국민적 환호를 받으며 퇴임한 최연소 여성 재판관 이정미와 파면당하고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소환을 눈앞에 둔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피할 수 없었던 숙명. 그 숙명의 파노라마에서 ‘헤어 롤과 올림머리’는 탄핵이라는 위대한 대하 드라마에 가장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싶다.
이동연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