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5월 [IF Media] ‘살아있는 박물관’ 바로크 음악제 /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⑦’살아있는 박물관’ 바로크 음악제
출처 : 뉴스토마토
2009년 12월8일, 라틴 아메리카의 정중앙인 볼리비아 콘셉시옹(Concepcion)에서 조용하지만 장엄한 기념 미사가 열렸다. 저녁 6시부터 시작된 미사는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미사 마지막 순서가 되자 1m 남짓한 성모상을 꽃가마에 실어 콘셉시옹 광장을 돌아 도시 전체를 순회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안데스 저지대 인디오들이고, 미사를 집전하는 대주교는 폴란드 출신 신부다. 미사를 돕는 수녀들은 멕시코 과달루페 수녀회와 한국 대구교회 분들이었다. 콘셉시옹 미사는 지난 300년간 지속돼 왔다.
아마존 물줄기의 원천인 이곳에는 뉴욕 필하모닉과 농촌의 아이들이 바로크 음악을 협연하는 일도 간혹 있다. 2년마다 여름이 되면 아마존 숲속에서 국제 바로크 음악제가 열린다. 성당 안에서 진행되는 음악회에는 노르웨이와 독일, 칠레 등에서 온 연주자들이 유서 깊은 바로크 음악의 선율을 여름 밤하늘에 선사한다. 그중 단연 주목받는 것은 이곳 초등학생들이 연주하는 17세기 바로크 음악이다. 신기한 것은 이들이 연주하는 곡은 바로크 음악이 태어난 유럽에서는 이미 사라졌지만, 아마존에서는 원형의 악보에 따라 연주된다는 점이다. 콘셉시옹의 산 미구엘 성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성당 자체가 파이프 오르간을 품고 있어, 성당 전체를 울림통으로 연주된다. 말 그래도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바로크 음악과 인디오의 만남
영화 ‘미션’에 나오는 첫 장면처럼 300년 전 아마존 숲속으로 들어온 예수회 신부들은 원주민들과의 소통 수단으로 음악을 택했다. 인디오와 신부들은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들이었다. 신부들은 촌락을 만들지 않고 흩어져 살던 인디오 지역에 정착촌을 건설해줬다. 그리고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인디오들에게 음악을 들려줬다. 음악에 흥미를 느낀 인디오들은 점차 유럽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컨셉시옹은 이렇게 300년 전 예수회 신부에 의해 처음 생겨났다. 정착촌은 수십km 사이에 띄엄띄엄 만들어졌다. 산 하비에르, 산 호세, 산 미구엘, 산 라파엘, 산타 안나 등은 오늘날까지 남았다. 예수회 정착촌들은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아마존 상류에 자리 잡은 300년의 역사의 유서깊은 콘셉시옹 대성당의 야경. 성당 입구에는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집, 천국의 문(Casa de Dios y Puerto del Cielo)’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라틴 아메리카의 예수회 정착촌은 1609년에 파라과이 아순시온 근처에서 처음 시작됐다. 정착촌은 대항해시대 이후 진행된 가톨릭 선교와는 다른 방식의 선교여서 원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전에는 식민지 전쟁 형태로 선교사들이 활동했다. 에스파냐는 1492년에 지리상의 발견을 한 그해까지 이슬람 정복전쟁을 하고 있었다. 선교는 ‘영혼의 정복’이었다. 유럽의 기독교 전파는 칼끝으로 이뤄졌고 가톨릭 국가의 해외 팽창사업은 교황으로부터 십자군으로 인정받는 칙서를 받았다. 그들은 인디오의 우상과 신전을 때려 부수고 매질과 감금, 추방 등 야만적 방식을 일상화했다. 그런데 1540년 비교적 늦게 만들어진 예수회는 1570년부터 신대륙에서 선교를 시작하고 17세기 초반에 파라과이 정착촌을 개척할 때까지 과거 유럽의 선교 방식과 달리 ‘적응지주의’를 수용했다. 현지 문명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며 공존하자는 취지였다.
영화 ‘미션’의 과라니족과 예수회의 새로운 교류
예수회 신부들이 주로 선교를 한 대상은 과라니(Guarany)족이다. 이들은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 볼리비아 그리고 콜롬비아까지 흩어져 살았던 저지대 인디오들이었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것처럼 인디오들을 대상으로 한 예수회 정착촌이 브라질 근처와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그리고 볼리비아 등에서 생겨났다. 그중 가장 활발히 활동한 곳이 파라과이 정착촌이다. 식민당국은 정착촌에 세금을 면제했고 자치권(Autonomy)도 인정했다. 자율성이 확대되면서 예수회는 과라니족으로 된 군대까지 만들었다. 150년 동안 이 정착촌은 새로운 문명 간의 대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예수회 신부들은 페루 리마에서 과라니어를 배우고 각자 과라니 정착촌으로 파견됐다. 그들은 아마존 숲속이나 파라과이 평원지대에서 인디오와 서구 문명의 공존을 모색했다. 그러나 정착촌이 늘어가고 자리를 잡을수록 예수회와 식민당국의 갈등도 커졌다. 과라니 정착촌에서 생산성이 증가하고 세금은 면제되고 과라니족 자치군대까지 생겨나자, 식민당국은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문제 삼았다. 이 갈등은 결국 과라니족 군대와 에스파냐 군대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됐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국경에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세력권 문제로 충돌이 발생, 현지 인디오 입장을 두둔하는 예수회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결국 과라니 군대와 주민들은 에스파냐 군대에 학살당하고 정착촌은 붕괴됐다. 그리고 1767년 마침내 예수회가 축출당함으로써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에 있던 예수회 정착촌은 해체됐고, 지금은 그 건물 잔해만 남았다.
치키타노스(Chiquitano)의 지역 공동체 인디오 주민들이다. 에스파냐어로 ‘작은 형제들’이라는 치키타노스의 의미대로 엄마도 아이들도 키가 아주 작다. 이 지역 공동체는 밀림을 중심으로 그들의 협력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정착촌과 달리 볼리비아에 있는 예수회 성당들은 여전히 인디오 공동체 중심으로 존재한다. 파라과이 정착촌과 달리 이곳 원주민은 치키타노(Chiquitano)족이다. 치키타노는 스페인어로는 ‘키 작은 종족’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곳은 에스파냐 식민지 중에서 가장 나중에까지 백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원시림이었다. 치키타노는 인디오 중에서 키가 가장 작은 종족으로, 산타? 크루즈 북쪽에 흩어져 살았다. 파라과이 정착촌이 시작된 뒤 꼭 100년째 되던 1709년에 예수회는 그 중심지에 콘셉시옹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이름 자체가 ‘예수를 잉태한 성모’라는 의미로, 예수회가 이곳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콘셉시옹의 성당 입구에 ‘하느님의 집, 천국의 문(Casa de Dios y Puerto del Cielo)’이라고 적을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바로크 음악을 통해 ‘키 작은 형제(Chiquitanos)’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예수회 신부들은 콘셉시옹으로부터 150㎞ 정도 떨어진 과라니족 공동체인 우루비차(Urubicha)에서 유럽보다는 작은 크기의 바이올린을 만들어 인디오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살아있는 박물관’의 시작이었다. 우루비차 숲속에서 바이올린이 인디오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선교사들이 유럽에서 가져온 바로크 음악 악보에 따라 치키나노스 인디오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아마존 상류 원시림 속에서 서양 선교사와 인디오들이 만든 이채로운 만남이었다. 유목생활을 하던 치키타노스족들은 예수회 신부들과 함께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정착촌에서 유럽 백인 문화와 라틴 아메리카 인디오 문화가 절묘하게 결합했다. 볼리바에서 정착촌은 콘셉시옹뿐만 아니라 산 하비에르, 산 호세, 산 미구엘, 산 라파엘, 산타 안나까지 확대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역을 기점으로 남미의 큰 두 강의 물줄기가 갈라진다는 점이다. 콘셉시옹 등 치키타노스 지역의 물은 브라질 아마존 강으로 유입되지만 바로 인접한 과라니족이 사는 우루비차 등의 물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우루과이 국경을 이루는 라플라타 강(Rio de la plata)으로 합류한다. 라틴 아메리카 거대한 두 강물의 시원지에서 다른 두 문명이 폭력적인 세계화가 아닌, 교류와 우정을 통한 공존하는 세계화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우정의 만남이 남긴 긴 생명력
폭력이 아닌 친교를 통한 문명의 힘은 오히려 예수회가 해체되어 신부들이 떠난 뒤에 더 진가를 발휘했다. 1767년 무렵 예수회가 해체되면서 이 지역 대부분의 신부들이 떠났다. 그런데 이곳 인디오들은 흩어지지 않고 성당을 중심으로 자치적인 공동체를 유지했다. 여전히 주말에는 바로크 음악을 연주했고 그들의 생활양식으로 지켜나갔다. 예수회와 함께 했던 번영에 대한 기억, 문명화된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원래부터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문화가 그들의 새로운 문명을 지키는 힘이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그들은 아마존에서 예수회 신부들이 전해준 바로크 음악을 통해 그들의 공동체를 유지했다. 1931년 독일계 프란시스코 선교회가 이 지역에 파견돼 가톨릭 행정체제가 재건될 때까지 치키타노스 공동체는 자신의 문화를 150년 이상 온전히 지켜냈다. 이곳에서 독일과 폴란드 출신 신부들이 성당을 중심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바로크 음악을 지켜낸 힘은 인디오들이었다. 이런 노력에 감동한 스위스 예수회 출신인 한스 로스(Hans Roth)는 1972년부터 퇴락해버린 이 지역 성당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보수와 보존을 통해 이 유서 깊은 아마존 숲속 성당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이 공존하는 상호존중의?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2년마다 이곳 성당들에서는 국제 바로크 음악제가 열린다. 살아있는 17세기 음악을 듣기 위해 유럽과 아메리카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며, 유럽의 연주자들은 인디오 아이들과 공연하려고 대서양을 건넌다. 한 여름 밤에 아마존 성당에서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바로크 음악은 인류 문명사가 보여주는?하나의 경이다. 이 경이로운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깊은 감동의 울림이 밀려온다. 이들이 보여주는?공존의 방식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다.
2년마다 열리는 ‘국제 바로크 음악제’. 콘셉시옹 대성당 본당에서 인디오 학생들이 연주를 하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는 유럽에서 온 연주자도 함께 공연한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밀레니엄의 바로크 음악제가 던지는 화합의 메시지
지금 이곳에서는 협력과 화합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 신부들은 독일과 폴란드 출신이다. 한국 대구교구 신부 한 분도 이곳 시골인 산 아토니오 데 로메리오(San Antonio de Lomerio)에서 활동하고 있다. 콘셉시옹 성당에 부속된 직업 훈련학교의 장비와 컴퓨터 등은 독일과 한국에서 지원된 것들이다. 독일 시민단체들은 이 지역 공동체에 커피 농사를 전수해주고, 그 열매들을 공정무역의 방법으로 독일로 가져간다. 한국 수녀들과 교민들은 이 가난한 지역의 라디오 방송국을 위해 안테나를 기증했으며, 대구교구에서 나간 한국 수녀들은 현지에서 천형이라고 여겨지는 장애인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 지역 공동체에 봉사하는 수녀들은 멕시코와 한국에서 왔다.
콥셉시옹 성당에는 유럽과 멕시코 한국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필자 왼쪽에는 독일 뮌헨 출신 신부, 오른쪽은 폴란드 출신 대주교다. 뒤에 보이는 붉은 색 수녀님은 멕시코 과달루페 수녀회 소속이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대항해시대 이후 세계화는 문명 간의 대화와 협력보다는 힘을 통한 폭력의 세계화였다. 그 시대에는 선교조차 ‘영혼의 정복’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초입에서부터 시작된 치키타노스 지역에 대한 예수회의 선교는 예외적으로 친교와 우정을 통한 문명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보편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문명의 만남은 예수회가 떠난 후에 더 빛을 발했다. 그들은 스스로 이 바로크 음악과 문화를 지켜내면서 지금 인류에게 경이로운 ‘한여름 밤 아마존 밀림에서의 바로크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숙련과 기술에서야 뉴욕 필하모닉을 따라갈 수 없겠지만 치키타노스 지역의 인디오들이 300년 동안 지켜낸 화해와 협력의 정신만은 그에 필적하고도 남음이 있다. 치키타노스에서 울려 퍼지는 바로크 음악은 밀레니엄 시대의 인류에게 공존과 협력의 정신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운다.
임채원 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