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6월 [IF Media] 20대 국회 ‘그래도 정치’, ‘그래서 정치’ / 홍일표(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20대 국회 ‘그래도 정치’, ‘그래서 정치’]
출처: 머니투데이 the300
“협치는 깨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소위 ‘상시청문회법'(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자 야3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20대 국회 역시 ‘협치’가 아니라 ‘대치’로 시작될 것이라는 우려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5·18 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이 아니라 합창으로 부르겠다고 국가보훈처가 결정한 후에도 ‘협치 불가’의 목소리는 이미 터져 나왔다. 5월 초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학 동기인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를 만나 “지상명령은 협치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야당의 반발 수위가 높아지자 새누리당은 “법안 하나 때문에 협치 분위기를 깨는 것”이라고 오히려 날을 세웠다. 과연 이들이 ‘협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과연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헌법에 따랐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자체가 정치적 갈등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것의 시기와 방식도 또 다른 법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거부권 행사는 19대 국회 종료시점을 골라 이뤄짐으로써 국회 재의결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 전형적 ‘꼼수행정’이라며 야당은 반발했다. 아예 법률적 효력이 없는 원천무효이며 위헌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런 논란에 대해 정의화 국회의장은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거나 특정한 국정사안에 대해 조사할 수 있으며, 이에 필요한 서류의 제출 또는 증인의 출석과 증언이나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는 헌법 61조를 국회법 개정의 근거로 내놓았다. 그러나 황교안 국무총리는 이번 국회법 개정안이 행정부에 대한 과도한 통제로 3권 분립의 원칙을 훼손하고, 헌법상 국정조사제도를 유명무실하게 할 위헌소지가 있다며 거부권 행사가 정당했다고 반박했다. ‘협치’에 대한 상이한 해석만큼이나 ‘헌법’에 대한 이해도 제각각이다.
“협치 붕괴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협치가 아니었다.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협치(governance)는 행정부 주도의 관료적 지배나 전통적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을 시도하며 발전한 개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과 정부, 여당과 야당이 서로 협력하고 협의하는 것을 가지고 협치라 하지 않는다. 시민사회와 기업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 그리고 이들 사이의 권력분점과 권한분산이 훨씬 더 필요한 개념이다. 그렇기에 정치권 내부의 대치 국면을 이유로 협치 불가를 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국가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정치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커녕 교섭단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의당마저 빠진 채 진행되었던 청와대 회동을 두고 협치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리 정치의 수준과 민낯을 드러내 보인다. 그렇기에 20대 국회는 ‘협치의 재개’가 아니라 ‘정치의 복원’부터 시급한 과제로 둬야 한다.
“법대로 하는 게 정치의 다가 아니다.”
국회법 개정으로 청문회 개최가 용이하게 되면 입법부가 행정부를 진짜 통제할 수 있을까. 아마 귀찮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수많은 불법과 탈법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사청문회를 통과한 이들이 장관직을 버젓이 수행하고 있다. 이것도 법대로 하는 것이다. 청문회는 귀찮을 뿐 두렵지 않다. 국정감사도, 조사도 마찬가지다. 위증고발도 두려워 않는다.
결국 국회가 기댈 건 청문회 개최요건 완화와 같은 법률 조항이 아니라 국민의 힘과 뜻이다. 국민이 외면하면 있는 제도도 무용지물이며, 지지를 얻으면 제도가 미비해도 큰 힘이 발휘된다. 그래서 ‘국민의 목소리’에 누가 제대로 응답(response)하며 ‘국민의 삶(=민생)’을 어떻게 책임(responsibility)질 것인가를 둘러 싼 치열한 경쟁이 정치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국민은 그런 정치를 기대하고, 그런 국회에 기대게 된다. 20대 국회가 협치나 법치보다 ‘그래도 정치’, ‘그래서 정치’를 우선 복원해야 하는 까닭이다.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